[땅의눈물땅의희망] 16. 자동차
20세기 지구 생명체를 병들게 한 주범, 자동차.
초겨울 해 뜨자마자, 전북 진안을 떠나 장수를 거쳐 경남 함양으로 길을 잡는다. 도로는 텅 빈 듯 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첫눈을 덮어쓴 산들은 눈이 부실 듯하다. 혼자 그런 길을 운전하는 내 마음은 감상을 넘어 미안하기까지 하다. 늦가을 해 질 무렵 타작까지 끝낸 김제 만경 들판을 달린다. 가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길을 걷는다. 문득 집에 두고 온 내 아이들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이런 길을 자동차로 달릴 때는 운전도 즐겁고 자동차도 고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년에 서너 번 정도, 대부분은 짜증과 울화와 피곤에 젖어 운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다. 1999년 8월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대수는 1086만여 대, 얼마전 드디어 1100만 대를 돌파했다는 보도를 접한 기억이 난다. 이 중 승용차가 70%를 넘는다. 대충 네명에 한대 꼴로 자동차가 있는 셈이다. 이 차들이 땅을 점령하고 소음을 내지르고 매연을 내뿜는다. 인명 살상 기계가 될 때도 있다. 1903년 고종이 자신의 재위 40주년 기념식장에 타고 가기 위해 주문한 자동차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백년도 안되어 최고의 문명 이기이자 최대의 괴물로 둔갑한 것이다. 이 해에는 서울에 상수도가 착공되기도 했다. 물자 소비의 귀신인 자동차와 물 소비의 귀신인 수도가 같은 해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은 무슨 귀신의 장난일까?
자동차의 직접적인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환경학자들의 지적이 있었다. 또한 자동차가 공해를 일으키는 제1의 주범이라 꼽는데도 환경운동가들의 이견이 없을 정도이다. 사실 나는 자동차의 심각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나는 자동차가 얼마나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것인지를 풍수적 입장에서 정리해보고자 할 따름이다. 알다시피 자동차는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으로 그 생산량이 떨어지면 경제가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도로를 넓히면 자동차는 그보다 더 빨리 늘어나고 자동차 생산을 줄이자면 그만큼 나라 살림에 주름이 가니 이야말로 이율배반, 자가당착,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셈이다. 게다가 일찍이 박용남씨가 지적한대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책결정자나 계획가들은 주로 자동차 이용자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경험과 관심은 교통 계획과 정책 수립 때 잠재의식으로 나타나는 바, 그것이 바로 숙명주의적 교통 계획”이란 것이다. 환경운동가들 자신이 자동차를 이용하여 환경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은 분명 비극적 코미디이다. 이 점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주로 이 땅을 살리자는 주장을 펴고 살아가는 사람이 무려 11년 간 자가용을 타고 다녔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지난해 큰아이 군대 보낸 뒤 울적한 심사에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 면허 취소를 당하는 바람에 본의는 아니지만 `급진적 무자동차 운동가'가 되었지만….
우리는 길을 도로라 부른다. `로'만으로도 충분히 뜻이 통하지만 꼭 `도'를 붙이는 까닭은 길이 단순한 공간 이동로로서만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며 걷도록 의미를 부여한 까닭일 것이다. 예컨대 지하철은 좋은 통로인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길이라 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근대 지리학의 태두로 불릴 만한 숙종 때의 실학자 신경준은 그의 <도로고>에서 이르기를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어짐은 집안을 편안케 하고 의리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고 하겠다.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고 했다. 이는 길의 공유성과 무차별성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도로의 교향곡>에서 허먼 슈라이버도 비슷한 말을 한다. “도로는 모든 이의 공유물이고 어디로나 통한다. 장례 행렬도 결혼식 행렬도 같은 도로 위를 거쳐서 간다. 성직자가 걸어가며 내는 먼지는 바람난 처녀의 하이힐 위에 떨어진다.”
요즈음은 어떨까? 우리나라의 도로는 수레가 다니기에도 부적합한 곳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수령이 부임하러 가다가 길이 너무 험하여 사표를 내고 되돌아갔다는 얘기까지 나왔겠는가. 경기도 가평의 석파령, 전주-진안 경계의 적천현, 공주로 들어가는 차령고개 등이 대표적인 `사직고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속도로에 포장도로에 그야말로 그런 전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럼 정말 좋아진 것인가? 지금 도로의 주인은 결코 사람이 아니다.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미국 경찰이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보행자는 교통 흐름을 막는 가장 주된 장애물”이라 규정하고 있는 정도이다. 사람 편하자고 만든 도로가 사람을 가장 극단적인 훼방꾼 정도로 보게 되었으니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내 개인 경험으로는 여의도에서 당한 황당함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길 건너 목적하는 건물이 보이는데 도무지 건너가는 길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사람을 내몰고 자동차 위주로만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한참을 돌고 돌아 단 1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건물을 무려 20여분이나 헤맨 끝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자동차를 없앤다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 수를 줄이는 문제도 앞에서 언급한 대로 경제를 생각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터이다. 도로를 넓히면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으니 역시 딱한 일이다. 길이 넓어지면 결국 자동차는 속력을 더 내게 될테고 당연히 사고의 위험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또 시간이 좀 흐르면 결국 늘어나는 자동차 때문에 다시 체증을 빚게 되는 현상은 우리가 쉽게 목격해온 일이 아닌가.
언젠가 국도를 따라 도보 여행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니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인도가 있는 국도는 거의 없었고 그런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자동차에 휘말리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또한 굴곡이 심한 국도의 구조였다.
자동차에 관한 한 풍수는 망연자실,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성에 호소하여 어느 정도 숨통을 트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될 수 있는대로 나홀로 운전을 줄이고 장보러 갈 때까지 차를 몰고 나가는 일은 없애야 할 것이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행한다는 것처럼 일단 골목길에서는 무조건 보행자 우선의 원칙을 준수케 하고 특히 어린이들이 놀고 있을 때는 그 아이들이 스스로 비켜날 때까지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한다든지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풍수에서는 길을 주로 물에 비유한다. 물길이 막히면 썩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물의 현대적 변용인 길이 막힌다는 것은 그 사회가 썩고 있다는 반증이다. 물이 썩으면 결국 우리의 건강을 망치듯이 사회가 썩으면 우리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자동차로부터의 해방, 이것은 헛되지만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풍수가의 꿈이다./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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