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개벽사상과 풍수(하)

chamsesang21 2008. 11. 5. 13:04

[땅의눈물땅의희망]개벽사상과 풍수(하)
고려 개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은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의 무신과 경보와 같은 승려들이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도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신라 말의 난세를 극복하고 개벽 세상을 맞으려는 그의 염원과 개국공신들의 뜻이 맥을 같이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평산 신씨인 신숭겸은 본래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를 잡았다. 곡성은 태안사가 있는 곳으로 바로 도선국사가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곳이다. 연배로 보아 신숭겸은 도선의 제자 쯤 되는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도 태안사 입구 왼쪽에는 신 장군의 기적비가 서 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춘천시 방동리에 있는데 이 또한 도선이 왕건을 위하여 잡아 준 곳이라 하지만 시기적으로 믿을 바는 못된다. 다만 그곳이 임금이 묻힐 자리이고 땅 기운이 대략 2500년 정도 이어질 것이라든가 임진왜란 때의 신립 장군, 신사임당, 해공 신익희,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씨 등이 평산 신씨라는 사실을 이 무덤의 소응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나의 관심 분야는 아니다. 어찌 사람의 행위를 땅기운 덕이라 단언할 수 있으랴.

한편 경보는 도선과는 약 40년 차이로 같은 구림 즉 오늘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출신이니 그 관련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그는 도선이 35년 간이나 머물었던 광양 옥룡사에도 있었고 그곳에 비문도 남아 있으니 관련성에 대한 추측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본다. 나머지 인물에 대해서는 기록에서 도선과의 특별한 인연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자생풍수의 개벽사상은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는 데는 적절하지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이미 새 세상이 되었는데 누군가가 또다시 개벽을 꿈꾼다면 그것은 신 왕조에 대한 반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생풍수는 왕조가 기틀을 잡을 무렵이면 산간이나 오지로 숨어들어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다시 난세가 되면 고개를 드는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다.

12세기 고려 17대 인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만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허수아비 노릇 밖에는 하지 못한다. 본래 인종은 아버지인 예종과 어머니인 이자겸의 둘째 딸 순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자겸은 권력 확대를 위하여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요즈음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만 사실 이런 일은 고려 왕실에서 흔치 않게 벌어졌던 일이다. 이자겸은 인종을 독살할 생깍까지 품었으나 성공치는 못하고 척준경에 의하여 제거되고 이어서 척준경 또한 정지상에 의하여 유배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고려 왕실은 아수라장을 방불하게 되었고 이에 인종은 개성의 땅 기운이 다 했고 평양에 새로운 기운이 돈다는 서경천도설에 기울어 그에 진력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김부식에 의하여 척결되고 묘청은 부하에 의하여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된다. 후세 사가들의 묘청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이홍직 박사같은 이는 “당시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개성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 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그 시대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지리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평양 중심의 중흥 정치를 이루어보고자 한 것이 당초 그들의 이상이었다”고 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는 순환하는 것인가? 고려 말 공민왕 때는 요승으로 낙인 찍힌 신돈이 등장한다. 처음 그는 전민변정도감(토지개혁청)을 설치하고 권세가의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는 등 고려 사회 내부의 혼탁한 폐단들을 처단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 권력에 압도되어 교만과 음탕을 탐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그 역시 평양 혹은 충주로 천도를 꾀했다는 점이다. 자생풍수론자로 보이는 역사적 인물들이 하나같이 천도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것이 성공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시대상과 함께 그 일을 추진했던 사람의 됨됨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필자의 짐작일 뿐이다.

이어서 시대는 또 하나의 역성혁명을 준비하게 된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배후에 있는 무학대사는 오랜만에 나타난 도선국사의 자생풍수 맥을 이은 성공한 승려이다. 이성계에게 임금이 될 예언을 해주었다는 설화를 남긴 바 있고 당연히도 새 왕조의 수도 입지 선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그는 말하자면 이성계의 사부이자 고위 정치 참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정사의 기록들은 그를 우유부단하고 아둔한 인물로 묘사한다. 아마도 그를 자신들의 정적으로 간주한 유학자 출신 관리들이 무학을 폄하하기 위하여 만든 무고일 것이다. 그는 풍수에 고수였음은 물론 도력으로도 이름을 떨친 바 있으나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혁명에 성공한 제1급 개국공신이었으면서도 그는 역사의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그 점만으로도 그가 아둔한 술승이 아니라 식견있는 당대 최고의 학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조선은 미증유의 대란을 겪는다. 그의 뒤를 이은 광해군으로서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때 나타난 것이 교하 천도론을 들고 나온 이의신이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고산 윤선도의 처고모부가 되지만 서얼이기에 벼슬살이에는 크게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이 앞날이 불분명한 모험을 할 까닭이 없다. 당연히 신하들은 이의신을 처벌하자고 주장한다. 광해군 6년 한햇동안 무려 100회 이상의 처벌 주장 상소가 올라오지만 다행히 광해군의 비호로 목숨은 건진다.

순조 때 평안도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홍경래 역시 풍수를 알고 있던 사람으로 특히 그의 최측근인 우군칙은 당대 관서 제일의 풍수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그들이 군사를 조련시킨 곳이 가산의 다복동이란 점도 풍수를 소외 계층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한 그의 정치적 계산을 엿보게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잇달아 일어난 민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자생풍수의 개벽사상은 마지막을 맞게 된다. 갑오동학농민전쟁이 그것이다. 동학 3걸이라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모두 풍수나 도참에 크게 기울었던 사람이란 것은 전북 일대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개남의 생가가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이며 전봉준은 그 딸을 이 부근으로 시집 보낸 바 있고 그 자신도 여기서 첩을 얻어 한동안 살았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이 있다. 손화중은 청학동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으니 이들이 풍수의 맥을 이은 사람들이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풍수가 발복풍수가 아니라 자생풍수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명당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대동사회를 건설할 터를 동곡에서 꿈꾸었다는 대목에서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동족이 아닌 왜국에 의하여 꿈이 좌절되고 만다. 결국 외세에 의하여 자생풍수의 맥은 완전히 끊기고 이때부터는 철저히 이기적 발복풍수만 남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계룡산 근처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던 것은 또 무슨 역사의 장난일까? 통일 수도가 교하가 된다면, 그것은 자생풍수의 부활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겸임교수

'건축 > 건축과 풍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치환 시인의 고향, 거제 둔덕면  (0) 2008.11.05
자동차  (0) 2008.11.05
개벽사상과 풍수(상)  (0) 2008.11.05
구미 유럽에 부는 풍수바람  (0) 2008.11.05
금수강산 그린벨트  (0) 200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