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개벽사상과 풍수(상)

chamsesang21 2008. 11. 5. 13:03

[땅의눈물땅의희망] 개벽사상과 풍수(상)
제목 : 개벽사상에 뿌리를 둔 자생풍수(상).

우리는 풍토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과는 다른 풍수지리학을 가지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지리란 지표 현상에 대한 기술이고 풍수는 땅 속 기운에 관한 지혜이다. 우리 풍수가 도선에 의하여 정리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 환경에 맞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이룩한 것이기 때문에 자생풍수란 용어를 사용케 된 것이다.

도선은 당대의 석학이자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창자인 혜철의 제자이다. 그가 선종의 가르침을 혜철로부터 전수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풍수는 지리산의 한 이름 없는 기인으로부터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배웠다고 기록은 전한다. 왜 그랬을까? 만약 혜철로부터 풍수까지 전수받았다면 구태여 그 사실을 숨길 까닭이 없었지 않겠는가? 게다가 지리산 기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풍수를 `천한 술법'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당시 고승대덕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승 출신들이다. 혜철도 당나라에 25년 동안이나 머물렀으니 그 조건은 충분히 갖춘 셈이다. 반면 지리산 기인은 도선을 지리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제자·弟子)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지 수백 년이 됩니다. 인연이 있어 작은 술법(소기·小技)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을 대사님께 바치려 하오니 천한 술법이라고 더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훗날 남해의 물가에서 전해 드리겠습니다”하며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취한다.

신라 하대의 흉흉한 세태 속에서도 선진 당나라 문물과 우리 자생 풍속에 대하여 사람들이 심한 편차를 두고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지어 인문학 분야에서까지 선진국에 유학을 가 학위를 받아와야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소위 유학파와 국내파의 차별론으로 비화되었던 현실이 당시에도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추정이 정통 사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이유에서 이 추리를 끌고 갈 생각이다. 첫째, 문헌 기록에 의존하는 실증 사학이 현장을 경시하는 태도 때문에 역사지리학에서 현장 답사를 통해 이루어 놓은 성과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김유신의 신라군과 계백의 백제군이 최후 결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는 현장 답사를 통하여 상당 부분 복원이 가능하다. 이 점은 <한국의 자생풍수>(1997년 민음사)에 자세히 수록하였으므로 생략하거니와, 문헌 기록이 없어도 전설이나 설화·민담·지명 등에 의하여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들째,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어차피 한쪽 편에 서서 그 쪽을 두둔하며 쓴 한 사람의 것일 뿐이지만, 그래서 편견이나 왜곡의 가능성이 상존하지만, 전래 설화들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생각과 정보가 서로 짜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폐사지 발굴 결과를 보면 기록에는 전혀 없던 내용이지만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얘기가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상당수에 이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 북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장정심 관장의 주장 중 “력사적 상상력은 조국의 력사를 풍부하게 해주고 그 의미를 애국적으로 되돌림으로써 새로운 력사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일인 만큼 반실증주의적이라 하여 무턱대고 반대만 할 일은 아니다”는 대목에서 애국적이란 의미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을 개탄한 대목은 새겨 둘 만한 것이라 여겨져 또 하나의 전거로 삼고자 한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요컨대 문헌 기록에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자생풍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풍수로 인정될 만한 고사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신라 4대 탈해왕이 토함산에 올라 7일간을 머무르며 성안에 살 만한 집터를 물색하다가 드디어 초사흗날 달 모양의 집터를 보고 그곳을 속임수를 써서 빼았았다거나, 선덕여왕이 여성의 성기 모양인 여근곡에 숨어 있는 백제군을 풍수적 해석으로 찾아내어 섬멸했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런 예일 것이다. 초승달은 앞으로 점차 커나가는 형상이기 때문에 번영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여근곡 얘기는 겨울에 옥문지란 곳에서 개구리가 우니 여왕이 이를 듣고 옥문이란 여성의 은밀한 곳으로 반드시 여근곡이란 곳이 있을 것이고 그를 덮치면 적병을 잡을 수 있으리란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일부 문자에 매달리는 학자 중에는 그런 기록 속에 풍수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으니 그것을 풍수라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사실을 좁게 해석한 데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전통 과학이라든가 전통 환경관이라 했을 때 과학이나 환경이란 용어 자체가 현대어니까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환경관이나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유사한 논리 전개 방식이기 때문이다.

도선에 의하여 정리된 자생풍수를 개벽사상에 연결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사상이 난세에 등장하여 상당한 역할을 했음에 기인한다. 그 자신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라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은 선의 경지를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생풍수는 중국의 이론풍수와는 달리 풍토 적응성에 역점을 두게 되기 때문에 지식층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는 젊어서 15년 간 두타행이라 불리는 운수 행각을 벌이며 국토 곳곳을 직접 답사한다. 이 답사를 통하여 그가 얻은 것은 민심의 동향과 우리나라 지형 지세에 대한 세밀한 지식의 축적이다. 신라 말 이미 경주 중심의 국세는 중부지방 호족들에게 돌아가 있었고 민심 또한 한반도의 동쪽 귀퉁이인 경주를 중심으로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게다가 지형 지세에 대한 파악은 군사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대본영은 소위 미국과의 본토 대결전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이 유리한 첫번 째 조건으로 자기 네 국토이기 때문에 지형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대전이 그러할진데 옛날의 전쟁에서야 그 유리함이 어떠하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도선은 오랜 국토 편력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가 중앙 중심에서 지방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중앙 귀족에서 지방 호족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고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송악(개성)에 가서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의 집터를 잡아주며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였다는 내용과 왕건이 17살 되던 해에는 직접 송악에 가서 군을 통솔하고 진을 짜며 땅의 이치와 하늘의 계시를 알아내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도선본비>에 자세히 나와 있으나 이는 그의 제자들의 행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도선은 그의 자생풍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 것이며 결국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고려 개국이란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1차적으로는 이를 완수하게 된다.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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