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눈물땅의희망] 12. 금수강산 그린벨트
산천을 크게 건드린 통치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풍수계의 속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시황제의 진나라를 꼽는다. 그는 수많은 대운하와 만리장성을 축조하며 중국의 산맥과 수맥을 토막낸 인물로서 대륙울 통일한 지 불과 19년 만에 나라를 잃고 만다. 고려 태조 왕건은 도선 국사의 뜻에 따라 가급적 땅을 건드리지 않고 개경에 만월대를 지음으로써 아들들이 셋씩이나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행운을 누린 반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어설프게 좌우 대칭형인 중국식 풍수 격식에 맞추려 경복궁을 지으면서 서울의 주산인 북악의 맥을 다치게 하여 골육상쟁을 겪게 되었다는 얘기 등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가장 격렬하게 산천을 도륙한 사람은 박정희일 것이다. 고속도로, 공단 조성, 다목적 댐, 대규모 간척 사업 등 그가 벌인 토목 공사는 그의 추종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단군 이래 최대의 것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그가 바로 그런 사업 중 하나인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친 날 밤 부하에게 피격되었다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조화는 무슨 조화? 나는 이런 풍수상의 인과관계 부여를 속된 잡설이라 이미 전제한 바 있다. 다만 얘기를 시작하기 위해 꺼낸 단순한 재밋거리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해두고 그린벨트를 생각해보자.
지난해 7월의 정부 발표로 이제 그린벨트는 점차 사라질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본디 그린벨트는 1580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계획된 방역선을 효시로 하나 지금의 의미와 비슷한 개념의 그린벨트는 1947년 도시 성장 억제, 농경지 보전, 위락 기능 확충을 목적으로 영국 런던에 폭 10마일의 환상 녹지대가 형성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는 1971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하여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 때의 설치 목적은 환경이 아니라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위주였다. 결과적으로 자연 보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지만, 그리고 일본인 국토계획 전문가가 한국의 가장 성공적인 국토 정책으로 그린벨트 제도의 성공을 꼽으면서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도시 주변에 21세기에도 녹지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경이적인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 평가하고 있지만, 본래의 출발은 경제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풍수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는 그가 풍수에 대해서 상반되는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의심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에 현혹되면서도 공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전연 개의치 않았다는 추측이다. 그가 경북 구미에 있는 선산 문제로 당시의 세력가이자 대지주인 장택상 집안과 불편한 일을 겪었다는 현지 주민의 얘기가 있고, 육영수의 묘지 선정 때 지관들이 간여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문에 의하면 행정 수도 입지 선정이나 독립기념관 건립 계획에서도 지관들의 자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개발을 이끌며 국토를 휘저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풍수가 말하는 산천의 복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 점은 김일성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역시 대규모 토목 공사로 북녘 산하를 절단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건설했다는 대표적인 구조물들, 예컨대 인민대학습당과 그 앞의 김일성광장, 바로 그 앞 대동강 넘어 인민대학습당과 기하학적 균형을 지니고 건설된 주체탑(사진), 주석궁, 그의 지시에 의하여 이전 개건된 단군릉을 돌아보며 내가 느낀 판단은 김일성 역시 박정희처럼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풍수를 “봉건 도배들의 터잡기 땅놀음”으로 규정하면서도 자신의 통치 기반에 도움이 될 구조물들은 철저히 중국식 풍수 이론에 맞도록 꾸며 놓았더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린벨트와 유사한 개념이 있었다. 금산(禁山, 혹은 서산·四山)제도란 것인데, 서울 주변의 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벌채와 토석 채취를 엄금하던 일이다. 지방에도 이런 제도는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목재용 소나무 보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격이 좀 다르다. 주택은행 환동환씨의 연구에 의하면 금산의 운영은 왕권의 절대적 관심 속에 가혹한 처벌을 규정하여 엄격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금산에서 벌목이나 채석을 하는 자는 곤장 90대에 처하고 벌채한 자로 하여금 그 수대로 나무를 다시 심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 규정보다 더욱 가혹하게 시행되었는데 세조 때 기록을 보면 나무 한두 그루를 베었는데도 곤장 100대를 치고 열 그루 이상을 베었으면 곤장 100대에 온 집안을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적도 있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제도이다. 나무를 베었으면 그 수대로 다시 심으라는 것이니 합리적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를 끄는 대목은 박정희도 그린벨트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였다는 점이다. 이 제도의 관리 근거는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인데 일개 건설부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정할 때는 반드시 대통령의 사전 재가가 있어야 했고 사무 처리 역시 지극히 경미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대통령의 결재를 필요로 했다. 당시 대통령이 `친히'(왕조 시대의 용어이지만 인용문이라 그대로 두기로 함) 시행한 행정은 그린벨트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 예가 없었다는 것이 국립지리원장을 역임했던 건설공무원 출신 김의원 교수의 회고이다.
왜 그랬을까? 조선 왕조는 그들의 왕권이 서울의 땅 기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맥이 흐르는 산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하여 금산 제도를 엄격히 시행한 것이지만 박정희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도 그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던 1970년대 유신시대에 부대에서 강연을 하던 한 연사로부터 계룡산 정도령이 바로 박정희의 이름 정자에서 나오는 바로 그이라는 강변을 들은 적이 있다. 밤마다 취침 전에 대통령 어록 청취라 해서 무릎을 꿇고 녹음된 박정희의 음성을 들으며 지내던 때인지라 그런 황당한 얘기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내기는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박정희가 자신을 후천개벽을 이끌 정도령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거나 그린벨트는 결과적으로 모든 환경 단체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유지를 주장할 정도로 대도시 주변 녹지 공간 보존에 공헌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현 정권에서 그것을 풀어버린다면 이는 산천 훼손의 역사적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에 경주 고속철도 통과 문제로 환경 단체와 역사학계가 이를 반대하자 주민들이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그들의 모임을 망쳐놓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현지 주민들을 직접 만나본 나는 의외의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대다수 주민들이 별 관심이 없었고 다만 대토지 소유자라든가 외지인으로 그와 관련하여 이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민 대표임을 자처하며 소동을 벌였다는 것인데, 혹시 그린벨트에도 그 사례가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발 다른 방도를 찾아서라도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녹지대가 살아남기를 바란다.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겸임교수
'건축 > 건축과 풍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벽사상과 풍수(상) (0) | 2008.11.05 |
---|---|
구미 유럽에 부는 풍수바람 (0) | 2008.11.05 |
쓰레기 처리 문제 (0) | 2008.11.05 |
지리산 평화공원 2 (0) | 2008.11.05 |
지리산 평화공원 1 (0) | 2008.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