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평화공원-하
전남 구례읍 봉서리 갈미봉 아래, 분단 희생자들의 영령이 위안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난관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도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좌우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어느 쪽이든 피해를 입지 않은 집안이 없을 것이고 그 원한은 아직도 가슴 속 한자락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날의 원수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찌 원수와, 유명을 달리한 길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평화공원을 통하여 그런 고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지난회에 인용했던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어느 날 평화공원을 보았고 모든 원한은 눈 녹 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얘기가 나와야 된다. 소위 원한을 푸는 문제에 관하여 전북대 김기현 교수는 이런 지적을 한다. 유교는 귀신의 소멸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 `흩어지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오르고 정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그 기가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제 명에 죽지 못하면 그 기가 흩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에는 울분의 기가 극도로 발하여 요망한 것이 된다. 이 또한 이치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춘추시대 정나라의 백유라는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서는 어떤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자기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뒤 그들이 실제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원귀의 울분의 기의 소치로 생각하였다는 기록이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물론 그것도 종당에는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유교는 특히 원귀에 대하여 해원을 통하여 그 울분의 기를 빨리 풀어주어야 할 것으로 믿었다. 이는 아마도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의 조화, 즉 생성소멸의 조화로운 진행을, 인간 자신의 보정 행위를 통하여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 것으로 김 교수는 해석한다.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공원 내의 평화의 집 신축 계획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건축을 진보적인 건축가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같은 학교 김봉렬 교수에게 맡김으로써 평화의 집 자체를 분단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해와 평화로 전진한다는 취지에 부합하게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재단 행사를 `대립과 갈등에서 화해와 평화로'라는 주제로 일관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영령의 해원에 큰 보탬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생사의 화해를 넘어 먼저 죽은 자들 사이의 원한을 해소해주자는 목적 또한 신선하다. 이어서 산 자들도 화해의 길로 들어서야 함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산 자들의 화해, 그것은 바로 통일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행사에 대한 우려 또한 없을 수 없다. 이른바 극우 반공 단체들이 빨갱이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나설 수도 있겠지만 화해 자체를 거부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다. 알고 보면 이념에 종사한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다 같이 시대의 희생자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의 사업에 누가 강력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화해의 상징적 사건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1997년 12월22일 동짓날 오후 3시께, 그 때 내가 서 있던 곳은 황해남도 구월산 정상 부근 해발 950m 지점이었다. 구월산 관통도로는 그 해 9월9일 완공되었으나 개통식을 마침 그 날 했기 때문에 산 중턱에는 족히 천명은 넘어보이는 인원(북쪽 안내원은 2천명이라 했음)이 집결해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그들 사이를 헤집고 정상 바로 밑까지 가게 되었던 것인데 도로가 완전히 빙판이 되어 슬슬 뒷거름질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구월산의 성격을 남쪽의 치악산과 같은 양기탱천하는 산이라고 표현하였는 바 일행 중 한 사람이 그 사고를 당하고는 분기탱천한 산이 아니냐고 농담을 걸기도 했다.
바로 그 때까지 우리 눈에는 전혀 뜨이지 않던 인민군 40여명이 산 위쪽에서 달려 내려와 우리가 탄 차를 끌어 올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날 상당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좀 더 심하게는 인사 사고로 전개될 조짐마저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나이가 좀 든 듯한 중대장 얼굴이 지금도 눈에 생생히 떠오른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정성으로 도왔다. 그 지휘관은 인민군 대위로 중대장이라고 했다. `인민군' 대위와, 예비역이지만 '국군' 대위 출신인 내가 구월산에서 웃는 낯으로 만나 고마운 마음으로 헤어졌구나 하는 감회가 마음 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와 나는 만나면 서로 죽이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화해가 가능했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날 밤 평양의 숙소로 돌아와 술자리를 만들면서 함께 갔던 <중앙일보> 김형수 기자가 이런 농담을 꺼냈다. 북쪽 안내원 중 아태 평화위원회의 참사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고향이 남포직할시 용강군이고 또 다른 사람은 강서 출신이다. 중앙일보 건너편에 용강식당과 강서면옥이 있으니 통일 되면 두 분께서 서울에 와 식당을 차리면 돈 좀 벌겠다는 내용이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다.
화해의 역사적 사례 한가지만 더 들어보자.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 땅(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벌어진 신해교란에서 그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목으로 순교자가 된다. 이 교란 이후 교인이던 추순옥, 김말당, 김마루 등이 이곳에 숨어들어 살다가 순조 원년(1801) 벌어진 신유교란으로 결국 연풍관아에서 처형되고 만다. 천주교에서 1974년 바로 그 자리 4천여평을 구입하여 연풍현의 내아(관사) 건물을 사서 옮기는 한편 이곳 병방골 출신으로 고종 3년(1866) 충남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한 한국 천주교 103 성인의 한 사람인 성 황석두 루가의 입상을 세워 성역화한 것이다.
바로 그 배치의 상징성이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하다는 뜻인데, 성 황 루가의 묘소가 말하자면 성역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뒤로는 연풍 관아의 내아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에는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이 서 있다. 바로 그 모두를 감싸 안을듯 자애롭게 그리스도상이 정면을 포용하고 있는 가운데 그 뒤로는 멀리 병풍처럼 눈덮인 산들이 이들 모두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박해받던 순교 성인의 묘소와 박해하던 관아가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바로 이웃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의 상징성은 신앙인이 아닌 나같은 사람에게도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으니, 당자나 신자들은 어떠할 것인가.
고 김철호 선생이 평소 하셨다던 명언,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화해의 정신은 이곳 평화공원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뿌린 씨를 반드시 거두라, 한겨레 평화공원이여! 경산대 풍수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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