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지리산 평화공원 1

chamsesang21 2008. 11. 5. 12:58

[땅의눈물땅의희망] 지리산 평화공원(1)

지리산에 갈 때면 항상 마음이 설렌다. 그 크기도 압도적이거니와 역사적 상징성 또한 속세의 백면서생을 주눅들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까닭이리라. 한반도 남단의 최고봉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고 행정구역상으로는 3개 도에 5개 군을 포섭하고 있으며 노고단에서 정상인 천왕봉에 이르는 주 능선 길은 무려 45㎞로 백리가 넘는다. 그 능선에는 반야봉, 토끼봉, 명선봉, 제석봉, 영신봉 등 1,500m급 봉우리만도 10여개나 되고 섬진강과 남강으로 유입되는 화개천, 연곡천 등 물길 역시 10여개가 넘는다.

허백당 성현이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토했다 머금었다 하도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한 산. 금강산이나 설악산이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지리산은 백두산, 묘향산, 오대산, 덕유산과 더불어 5대 덕산으로, 5대 토산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나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우리는 지난 1월22일 그 자락에 둥지를 튼 실상사 언저리에서 `한겨레 풍수학교'를 열기 위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실상사의 약사여래가 일본으로 가는 땅기운을 막기 위하여 좌대 없이 맨 땅에 세워졌다거나 범종에 일본 지도를 그려놓고 매일 두들김으로써 일본의 흥왕을 억제한다는 민족풍수 설화를 여럿 지니고 있는 실상사 인근에서 인간 중심의 풍수, 고침의 풍수, 상생의 풍수를 표방하고 있는 자생풍수를 말하게 된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영호남을 아우르는 땅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젊은 학생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부모를 따라나선 어린이까지 한데 모여 우리 땅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행사는 여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 휴게소를 지나 인월에 들어서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지리산에 들어오는 자 모름지기 몸과 마음을 추스르라는 지리산 신령님의 계시일 터이다. 나는 인사말에서 풍수 자체의 논리 체계에 연연치 말고 허심탄회한 땅과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갖게 되기를 기원했다. 즉 이론과 현장이 부합하는 단계에 들어서 보라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 책 속에 산이 튀어 나오고 산을 바라보면 거기 이론이 씌어 있는 경지. 우리는 이를 법안(法眼)의 문지방을 넘어 도안(道眼)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지만 용어가 뭐 그리 대수인가?

터키의 유멍한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 이 말을 약간 변용시켜 이런 얘기를 만들어 본다. “2000년 1월 지리산 자락에서 한겨레 풍수학교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자연관은 바뀌게 되었다”라고.

하지만 이번 지리산행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이 한국전쟁 50돌인 올해 6월25일 상량식을 갖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분단 희생자를 위한 유해 안치소와 `평화의 집' 터를 확정하는 데 동참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정말 지리산은 산천 자체의 독보적인 자연 가치 이외에 좌우 대립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부닥친 장소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산이다. 재단에서 나온 분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지난 1월22일 밤길을 따라 구례로 향하는 중에도 연신 눈이 내린다. 밤이라 산행은 내일로 미루어지고 일행과 어울려 평화공원(가칭)에 관한 개략적인 사항을 듣고 의견을 나누는 기회를 가진 뒤 나는 다시 풍수학교로 돌아와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본격적인 답산에 들어갔다.

무슨 인연일까? 재단에서 지목한 구례읍 봉서리 터 예정지는 예전에 이미 답사한 적이 있던 곳이었다. 고 김철호 선생이 평생모은 돈과 함께 기탁해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의 정초가 된 이 터는 내게 풍수의 함의를 심각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즉 땅에는 각각 주인이 따로 있다는 지각유주(地各有主) 사상이 이 땅에 그대로 살아 숨쉬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평화공원의 성격과 이 땅이 가진 성격이 이렇게도 서로 잘 맞아 들어가는지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본래 구례는 지리산 남쪽의 고을로 산 크고 물 크고 들판 넓은(山大, 水大, 野大) 3대(三大)의 터전이다. 큰 산 아래는 큰 물이나 큰 들이 있기 어려운 법인데 이곳은 절묘하게 그것을 같이 갈무리하고 있다. 자생풍수의 할아버지인 옥룡자 도선의 <유산록>은 이 땅을 완벽한 복록을 갖춘 땅(完福之地)으로 표현하고 있는 정도이다. 도선 국사가 지리산 기인으로부터 우리 자생풍수를 전수받은 사도리 마을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나같은 풍수꾼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지리산 지봉인 천왕봉(정상인 천왕봉과 다른 산임)은 누룩실재와 요강바위산으로 동진하다가 갑자기 맥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와 갈미봉을 이룬다. 갈미봉은 다시 남쪽으로 진행하다가 섬진강을 만나며 백두대간의 대단원을 이루게 되거니와 이 갈미봉이 평화공원의 임자 산(主山)이 되는 것이다. 이 산을 어머니로 삼아 그 품안에 봉서리를 품었으니 바로 갈미 명당이오, 이 어머니의 자식같은 안산(案山)이 읍내 남서쪽에 있는 봉성산이다. 여기서 섬진강을 건넌 곳에는 오산이 우뚝한데 이 산에는 연기, 원효, 도선, 진각같은 네 성인을 기리는 사성암이 있어 이곳이 자생풍수의 본거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황홀하구나, 산 배치의 절묘함이여. 주산 갈미봉은 고귀한 학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의 선학승천형(仙鶴昇天形)이오, 안산인 봉성산은 배부른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양상의 와우반추형(臥牛反芻形)이니, 주산은 세속을 떠난 탈속의 경지에 허망함이 엿보이고 이것이 분단에 희생된 분들의 영면의 장소로 꼽히게 됨은 땅의 이치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자식인 와우는 평안히 되새김질을 즐기고 있고 강이 바로 앞에 있으니 목마른 수고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강 건너 오산은 노적가리 모양새로 쌓여 있으니 양식 걱정 또한 없게 되리라.

고 김철호 선생이 기거하던 집은 명당 품안 중에서도 어미의 젖가슴에 해당하는 혈처를 차지하고 있고 방향 또한 지리산과 섬진강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좌향을 잡았으니 흠 잡을 데 하나도 없다. 대체로 북동 방향, 탈속의 명당에 어울리는 좌향이다. 일찍이 화엄사 원공 큰스님도 이곳은 절이 들어설 터이지 살림집이 있을 땅은 아니라고 지적하셨다지만 나 또한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성격의 땅을 찾은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쏟아 붓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땅은 학이 되어 하늘로 간 사람들이 후세에 풍요와 평화를 보장하고 있는 곳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화해와 상생의 터라는 뜻이니, 이념도 신앙도 계급도 묻지 말고 같이 모여 살 길을 모색하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뒷사람의 의무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군경도, 좌익 빨치산도, 남파 간첩도, 북파 공작원도, 적군 묘지에 묻힌 유골도, 노근리 등지의 양민 희생자도 모두 함께 영혼을 위로받고 서로를 용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아직도 지리산 인근에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갈등과 적개심을 이곳에서 만이라도 없애버리고 공존하는 터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를 위하여 상징적으로 북한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남쪽 군인의 유해를 몇 분이라도 송환받는 노력을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쪽이 기울이고, 한국전쟁 50돌이 되는 준공식 때 그 분들의 영령도 위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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