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청계천은 잘 있는가?

chamsesang21 2008. 11. 5. 12:57

[땅의눈물땅의희망] ⑦청계천은 잘 있는가?

몇 해 전인가 복개된 청계천에서 각종 가스가 발생하여 폭발의 위험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니 그럴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여름철에 청계로를 지나다 보면 아닌게 아니라 겁이 날 때가 있다. 세상에 별별 사고가 다 발생하는 시대인지라 여름이 되기 전에 이 문제를 점검해야 좋을 듯하여 그 일을 생각해 본다. 한 때 많이 쓰던 말대로 유비무환 아니겠는가.

본래 청계천은 지금의 모습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서울 주변에 있는 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자연스럽게 하천을 이루어 한강으로 흘러들던 것을 조선 왕조가 서울로 도읍을 옮긴 이후 여러번 제방을 축조하거나 개축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와 세종 그리고 영조 때 특히 공사한 기록이 자주 나오지만 지세로 보아 굴곡은 좀 있었으되 현재의 청계천 흐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는 짐작이다.

물은 유동, 즉 흐름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막히면 죽고, 고이면 썩는다는 순리를 따르려는 노력이다. 즉 땅에도 숨길이 있어야 순환이 이루어져 건강을 유지한다는 이치이다. 청계천은 서울이란 땅의 숨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그 숨길은 하류 약간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덮개로 씌어 있다.

20세기 초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왕립아시아학회에 소개한 `한성부지도'에 보면 청계천의 본래 흐름을 잘 알 수 있다. 북악과 인왕, 남산 등에서 여러 줄기로 발원하여 서울 도심을 관통하다가 마장동에서 정릉천과 합류하고, 이어서 뚝섬 부근에서 한강에 유입될 무렵 중랑천을 어우르는 청계천은 그 오염의 심각함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양대학교 옆 청계천 하류의 개천 물은 물이 아니라 그저 걸쭉한 쓰레기의 흐름이었다. 이 물 한 바가지만 먹으면 세상없는 사람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물이 곧 이어 한강에 유입되고 서울 시민 일부와 한강 하류 주민들은 바로 이 물을 걸러서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세종 26년 당시 집현전 수찬으로 있던 이선로 등이 청계천에 대하여 “근자에 성 안 개천에다가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리는 일이 잦아 개천 물이 몹시 더러워졌는데, 그런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금지시켜 명당수를 청정케 하라”고 주청하였다. 사실 청계천이란 말은 일본인들이 지명을 바꾸면서 붙인 이름이고 고려시대 이래로 도읍의 배수가 잘 되도록 어느 정도 인공을 가한 하천을 일반적으로 개천이라 불렀다. 그래서 개성에도 개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개천이란 말은 서울에 있는 어느 하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인 셈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서 세종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집현전 교리 어효첨의 반대와 중신들의 동조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반대론의 골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성의 명당수는 어차피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풍수와 같은 믿기 어려운 이론 때문에 그런 명당수를 깨끗이 보존하려 하는가 하는 논리였다. 또한 풍수는 신령의 도리에 관한 것을 다루기 때문에 명당수의 깨끗함을 좋아하는 것이지만 도읍의 땅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지라 반드시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그런 것들을 소통시킬 수 있는 개천과 넓은 시내가 그 사이에 종횡으로 뚫리어 더러운 것을 흘러 내려야 도읍이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논리의 다름이 이와 같을 수도 있구나 하는 좋은 예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대립과 같은 양상이었다.

여기에 어효첨의 풍수 논리가 정연히 개진되고 있어, 그 내용은 지금까지도 풍수 공박의 중요 전거로 쓰인다. 그런데 한가지 간과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상소가 일반 상식에 부합되는 것이고 논리 또한 옛 글을 참고하여 정성을 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철저히 묘지풍수에 국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풍수를 산소자리 잡는 술법으로만 생각했지 당시의 지리적 지혜로 국토풍수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풍수는 묫자리 잡는 술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거니와 그가 주된 논거로 제시한 범월봉의 <동림조담>이란 책 또한 산소자리 잡기에 관한 술법풍수서라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당시의 다른 풍수적 논쟁에 있어서도 임금은 주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신하들은 대부분 그를 반대하는 형편이었고, 이 사건에서도 그런 도식은 어김없이 벌어졌다. 임금이 풍수 주장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서울 지맥의 보호가 결국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신하들이 이를 반대한 것은 그런 주장들이 비현실적이거나 경제성에 문제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의 극심한 오염을 바라보는 필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당시는 절대 권력의 행사가 가능한 왕조 시대였다. 그러니 정책만 결정된다면 상당한 무리를 해서라도 청계천 청정 유지를 위한 사업을 실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이선로의 주청이 받아들여졌더라면 요즘 말로 '청계천 오염 방지법'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 되었다면 하수는 달리 물 길을 내어 처리를 하고 청계천은 그야말로 푸른 물이 흐르도록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 오염 문제는 그 뒤에도 계속된다. 숙종실록이나 영조실록에도 도성 주민들이 똥, 오줌을 개천에 버리고 쥐, 고양이, 강아지의 시체는 물론 심지어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체까지 밤중에 몰래 내다버리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청계천의 지류인 정릉천 주변에서 살았다. 1950년대 중후반, 학교 가다가 내다버린 아기의 시체나 살아 있는 어린아이를 내다버린 현장을 몇번 목도한 경험이 있다. 전쟁 뒤의 피폐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대낮 서울 큰길 가에서 벌어진 그런 상황은 어린 내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대책없이 아이를 빙 둘러싸고 바라볼 뿐이고, 아이도 대개 죽어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이 살아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주장한 바와 같이 나는 이선로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어효첨의 반론 또한 그 논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혼란에 빠지곤 한다. 사람 사는 곳에 더러운 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는가? 본래 풍수에서 명당수가 시작되는 곳을 득이라 하고 빠져 나가는 곳을 파라고 일컫는데 득은 좋은 방위에서 와야 하고 파는 흉한 방위로 나가는 것이 좋다는 술법이 있다. 믿을 수 없는 잡설이지만 일리는 있다. 왜냐하면 사람도 입으로는 깨끗한 것을 먹어야 하지만 배설 또한 피할 수 없는 생리 작용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계천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스런 배설물이라면 어느 정도 견딜지 모르지만 변비와 설사에 각종 화학 조미료와 인스턴트 식품으로 뒤섞인 똥, 오줌이라면 언제까지 청계천이 참아줄 수 있을까? 게다가 서울의 각종 하수는 세제와 식품 첨가물과 화공 약품으로 유독성 가스까지 품고 있다지 않는가? 이 가스가 여름철에 폭발한다면 그 위력은 지금까지의 어떤 사고보다도 참혹하고 무차별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현대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조성된 시대이다. 보전과 개발 사이에 끼인 환경 모순이 극대화된 시점이란 풍수적 진단이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이 자연에 예속되었던 원시를 지나,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었던 환경 문제 불필요의 기나긴 역사를 거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던 환경 악화 시발점을 이미 통과한 시점이다. 그리하여 결국 환경은 이미 인간에 대한 복수에 착수한 것처럼 여겨진다. 좀 더 덧붙이자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망상과 자연의 인간에 대한 복수라는 대가가 교차하는 때에 이르렀다는 판단이다. 화해의 모색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하였다. 괴변이 돌고 쇠가 녹기 전에 청계천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