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삶의 의미 애정 깃든 곳이 명당이다 2

chamsesang21 2008. 11. 5. 12:55

[땅의눈물땅의희망] ⑤삶의 의미 애정 깃든 곳이 명당이다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 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도 없다고 되뇌이면서." 천상병의 시 <삼청공원에서>의 첫 부분이다. 많은 대도시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비인간적 인간 관계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현상의 지리적 원인은 무엇일까?

전통 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은 대략 이렇다. 산자락 아래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들어앉은 마을이 있다. 일어나 사립문을 열고 구불구불 마을 길을 지나 텃밭을 둘러보고 논밭으로 나가 일을 한다. 그 아래로는 개울도 흐른다. 일어나서 일터로 나오기까지 환경의 급격한 변이는 아무데도 없다. 공간 심리적 충격을 받을 장치가 없었다는 말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일터와 삶터, 즉 직장과 주택, 식자들의 용어로 하자면 직주공간의 이분화 현상이 심화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라 진단할 수 있다. 집을 나서면 갑작스런 소음과 복잡함으로 차 있는 골목길을 그대로 만나게 되고 여기서 시장을 지나 술집, 다방, 여관 같은 것들이 진을 치고 있는 유흥가를 거쳐 큰 길의 빌딩숲을 만나게 된다. 지옥으로 표현되는 출퇴근의 교통난을 겪으며 직장에 들어서면 바로 엘리베이터, 거기서 내리면 다닥다닥 붙은 책상들이 가득한 황량한 자기 자리로 간다. 환경의 변화는 순간마다 충격적이다. 신경이 피로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런 격렬한 환경 충격 속에서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다들 이런 충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젊은 세대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서울대를 사직하고 한겨울 아이들을 데리고 영월을 찾았을 때 내 속셈은 이곳에서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흘도 참지 못했다. 소음도 없고 사람도 없는, 다만 자연만이 출중한 이곳을 아이들은 견디지 못했다. 큰 아이는 지금 군 복무중이다. 지금도 그 아이는 시골 가서 살거면 아버지와 어머니나 가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어머니와 단둘이서 노래방에 가는 친한 부모 자식 사이인데도 현실은 그렇다. 다른 젊은이들을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무지 큰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자동차를 집도 없는 형편에 할부로 사들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반응에 오히려 이상하다고 보는 쪽은 그들이다. 삶의 양식에 대한 다중성은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 속도가 그만큼 차이가 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독단적인 판단은 자칫 설득력을 잃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 남는다. 그런 그들도 도시의 교통 혼잡 속에서 조급해하면서 짜증을 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도시란 곳이 뭔가 잘못된 곳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에 대한 용어를 빌려본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움직임, 개방, 자유, 위협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 반하여 장소는 정지, 개인들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이다. 경험을 통하여 미지의 공간을 친밀한 장소로 바꾼다는 것인데, 무상한 공간이 어떻게 의미있는 장소가 되는지의 예를 들어보자. 물리학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덴마크의 크론베르크성을 방문했을 때 보어가 한 말이다. "햄릿이 이 성에 살았다고 상상하자마자 성이 달라져 보였다. 과학자로서 우리는 이 성이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을 건축가들이 어떻게 쌓아올릴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실제로 햄릿이 여기에 살지 않은 것을 아는데도 상상만으로 한 의미없는 공간이 감상을 일으키는 장소로 변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의 용어를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말한 장소는 삶터 개념이고 공간은 단순한 빈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쳐 생각해 본다.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겠지만, 어린이들을 보면 모두들 저마다의 등교길을 가지고 있다. 그 애에게만 친밀하고 은밀한 곳, 혹은 그 어린이에게 시련이 왔을 때, 내일 발표를 한다거나 억울하게 야단을 맞았다거나 했을 때 그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가 있다. 그곳에서 그 아이는 평안과 안정을 얻는다. 바로 그 아이의 명당이다. 남들에게는 한낱 추상적인 공간에 지나지 않는 그곳이 그 어린이에게는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로 된다는 뜻이다.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인에게는 공동체적 삶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무차별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대도시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에게조차 그 사실은 설득력을 지닌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조화 방법은 없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앞서 제시한 어린이의 예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혼잡하다고 생각하는 대도시의 골목길에서 그 자신이 생각하는 적절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일상적인 활동이나 표준화된 행위들을 할 때, 분석적 사고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과 감각 그리고 직관에 의지하는 것이 사람들의 행동유형이다. 하지만 자동차는 그렇지 않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잠시도 분석적인 사고를 놓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을 놓는 순간이 사고의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과 관계없는 타인의 가족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겨운 일도 없다. 그들에게는 대단한 추억이 깃든 것이겠지만 남에게는 그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진부한 생존의 장에 지나지 않는다. 공허하기 그지없는 빈터란 말이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삶터에 대한 사랑을 가꿀 수 있게 된다. 퇴근길 시장 골목 순대집에 앉아 술 한잔 비울 때 느끼던 그 장소에서의 애정, 구부러진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헌 신문지를 조그만 수레에 싣고 다니는 할머니를 만났던 곳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측은지심, 첫눈을 만났던 지하철역 어귀의 붕어빵 리어카가 서 있던 곳, 이런 의미 부여가 도시에 살면서도 풍수적 안정감을 갖게 될 수 있는 비결이다. 어머니를 느낄 수 있는 땅으로 승화된다는 뜻이다.

천상병의 <삼청공원에서>는 이렇게 마지막 구절을 맺는다. "저 벚꽃 잎 속에는 십여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의 가장 인자했던 모습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 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어머니는 그리고 풍수가 말하는 어머니의 땅, 명당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당신의 마음 속에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