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하

chamsesang21 2008. 10. 31. 00:55

[땅의눈물땅의희망] ④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하

선조가 정여립을 간사한 배반자로 규정한 것도 그가 누명을 쓴 까닭이란 시각이 있다. 누명으로 보는 까닭은 우선 그 사건을 맡았던 송강 정철이 정여립이 도망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장본인이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기록은 정여립이 역모가 고변된 것을 알고 진안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역도들의 상장군으로 지목된 장사 길삼봉의 존재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인데 그 길삼봉이로 지목된 최영경은 결국 당파 간의 이해관계에 얽혀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행각에 이상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그가 선조 20년(1587년)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쳐부쉈는데, 그때 동원된 군사가 대동계원이란 사실이다. 정규병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성취한 셈이다. 더구나 그는 간통사건으로 몸을 피해다니던 천민 출신의 도술이 높은 처사 지함두, 자칭 요동 사람이라 하며 “왕기(王氣)가 전주 남문 밖에서 솟아오른다”는 참언을 퍼뜨린 의연이란 승려, 그리고 수많은 떠돌이들과 시귄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의 생각 또한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는 바가 많았다. 유비보다 조조를 정통으로 삼은 사마광의 통감을 옳은 말이라 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대의 철칙을 그저 제나라 왕촉의 주장일 뿐으로 폄하했으며, 맹자 또한 제나라와 양나라를 옮겨가며 왕도정치를 펴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 시대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반골의 기질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종합하자면 정여립은 반골이지만 그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것은 누명이란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미 고려 초 훈요십조에 의하여 반역의 땅으로 규정지어진 전라도는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그 오명을 다지게 되는 셈인데, 과연 반역의 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반역이란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왕조의 무능과 부패, 파렴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그것을 정도에 어긋난다는 뜻인 반역이라 쓴 것은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하는 민중의 처지에서 보자면 당치도 않은 논리가 된다.

당이 순하면 그 사람이 순하고 산천이 돌아앉듯 거역의 자세를 취하면 그 주민도 그를 닮는다는 것은 풍수의 주장이다. 일신의 평안만을 원한다면 순한 땅이 명당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서 공동체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풍수상 반역의 땅이란 이름을 가졌던 곳은 바로 그런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반역의 기운을 가진 땅이란 게 있을 수 있으나 반역이란 말이 가진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역의 땅이란 게 결코 나쁜 땅이 아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맞지 않는 땅일 뿐이다.

전라도는 넓은 들판의 땅이다.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低平)은 김제 만경평야를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모악산을 만난다. 들판은 지배층을 상징한다. 평지돌출의 모악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모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고 모악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마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것이다. 보수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하여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그 사이에 끼어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변화를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벽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의 궁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줌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자생풍수는 양생수기(養生修己)의 소박한 자연주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전라도는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천혜의 땅이었다. 그 풍성한 생산성이 타 지방에 위협감을 주게 되었으며 결국 전라도를 외경의 땅, 반역의 땅, 편견을 가지고 보는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라 여겨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전투에서는 후백제의 견휜에게 연전연패한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오죽했으면 자손에게까지 전라도에 대한 경계를 당부했겠는가.

천혜를 받았으므로 편견을 당해야 하는 땅, 전라도의 모순이다. 한데 기묘한 것은 지지난해 황해도 구월산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모악산, 또 하나의 계룡산을 보았다는 착각을 했었다. 북한 최대의 평야지대인 재령과 안악, 신천 벌방(들판의 북한 말)을 감싸안 듯 둘러싼 구월산은 이 역시 평지돌출의 곳으로 그 성격은 모악을 닮았다. 판소리 `변강쇠타령'에서 변강쇠가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목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동 금강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묘향산)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서 구월 좋다 하나 적굴(도적 소굴)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 토후(土厚)하여 생리(生利)가 좋다 하니 그리로 살러 가세.” 모반과 민족 신앙으로의 요람 같은 모악산과 도적의 소굴로 표현되는 구월산, 뭔가 당의 이치가 통하는 대목은 아닐까?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이상스럽게 정여립의 모반을 처음 고변한 사람들이 당시 황해도 관찰사와 재령군수와 안악군수와 신천군수 등이라는 사실이다. 구월산 자락의 수령 방백들이 떼를 지어 모악산의 정여립을 고변한 땅의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여립이 살던 집터는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현 전주시 색장동)에 있었다는 데 역모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집터는 연못을 파서 지금은 파쏘라 부른다고 한다.

이제 전라도는 과거의 한을 씻고 배역과 모반의 땅이라는 의미가 지니고 있는 긍정성을 받아들여 대인의 풍도를 가질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관례처럼 이뤄지던 사회에서의 모순은 단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교정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훗날 또 다른 단죄를 부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