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곳은 인간의 삶과 자연 환경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규정 지워지고 있다. 특히 의식주의 하나인 집은 더욱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점에서 생태-환경을 논하기위해서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수사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살기좋은 세상을 위해서도 풍수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을 음미해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볼수있다.
앞으로 실게될 내용의 일부 글들은 풍수학자 최창조씨가 한겨레 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모아 보았습니다.
1.자생풍수로 본 청와대(상)
땅의눈물땅의희망] ①자생풍수로 본 청와대-상
“위인은 세상의 불행”이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현대 한국 정계의 위대한 인물은 최종적으로 청와대를 지향한다. 한데 우연치고는 괴이하게도 과거 일제 정계와 군부 거물들의 지향점도 청와대였다. 물론 당시는 총독 관저였지만. 1945년 일본 패망 뒤 이곳은 미 군정 장관의 관저였고 1948년 정부 수립 뒤 경무대로 되었다가 4·19 나던 해에 청와대란 이름으로 대통령의 공간적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청와대가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라는 자 때였다. 그의 서울 도착은 강우규 열사에 의하여 피로써 막을 연다. 조선 총독을 한번 더 한 그는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자신보다 더 파쇼적인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살해되고 만다. 청와대의 첫 거주자가 피로 시작하여 피로 끝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뭘까?
이 자에 대해서는 풍수적으로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바로 김제 벽골제를 비롯한 우리 농경문화의 전통 유산을 `산미증식계획'이란 미명 아래 다수 파괴했다는 점이다. 특히 현재의 벽골제는 1925년 뚫은 수로에 의해 한 가운데가 절단되어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진시황의 오른팔로서 만리장성을 축조했던 몽념 장군이 진시황이 죽은 뒤 누명을 쓰고 처형될 위기에 이르렀을 때 했던 말을 상기해 본다. “나는 죄가 없다. 다만 장장 만리가 넘는 성을 쌓으면서 내가 끊어놓은 땅의 핏줄이 얼마나 많으랴. 이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다.”고 말한 뒤 자살하고 만다.
사이토의 뒤를 이은 제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는 군 장교 시절부터 돈을 좋아해 `배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위 야마나시 총독 독직사건에서 5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 구속되었다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말하기도 지겹다. 이제 간단히 다음 자들의 말로를 정리하자. 5대는 3대 사이토가 다시 맡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6대 우가키 가즈시게는 2차대전이 끝난 뒤 공직추방령에 의하여 1953년까지 은퇴했다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병으로 의정 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사망. 가장 악랄했던 총독 7대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뒤 전범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수감, 1954년 질병 때문에 풀려났으나 다음해 병석에서 사망. 8대 구이소 구니아키는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 1948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 마지막 9대 아베 노부유키는 미군 하지 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는 수모를 겪은 위에, 치사하게도 자기 책임 아래 있던 일본인들의 귀환을 뒤로 하고 자신의 아내와 손자 두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짐을 가득 실은 80t 짜리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폭풍을 만나 물건을 다 버린 뒤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친일문제연구 제5집,`조선총독 10인'참조).
대한민국 수립 뒤 청와대 주인들의 뒷얘기는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 새삼 거론하여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객사했고 윤보선은 어쩐 일인지 국립 현충원에 묻히기를 거부하는 예의를 치렀지만 사실 그는 실권자가 아니었으니 집 주인이라기보다는 세입자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 일본인 총독들의 말로와 비교해보면, 누구라도 이거 뭐가 잘못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주인이 되고자 시도했던 사람들 또한 순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신익희와 조병옥은 유세 도중 각각 기차와 미국의 병원에서 급사했고,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했다. 망우리 조봉암의 묘소에서 느낀 감회에 대한 나의 답사 기록을 다시 새겨 본다. 그의 무덤은 정남향임에도 불구하고 봉분에 잔디가 잘 자라지 못했다. 기분 탓인가, 근처 계곡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 스산한데 그의 원혼은 어디로 갔을까. 그가 2년간 공부했던 모스크바의 파괴된 공산주의 이념 속에서 회한에 잠겨 있을 것인가. 그가 충고를 해주고 떠났던 역시 사형 당한 남로당 박헌영의 혼령과 함께 역사의 허망을 배회하고 있을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음을 절감하여 이제는 평온하게 저승터를 잡고 있을 것인가.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았었고 김영삼은 재임중의 무능을 의심받는 외에 그의 아들이 수감되는 길을 걸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현 김대중 대통령 뿐이다. 풍수적 해결책은 무엇일까?
먼저 왜 그런 지경의 터를 잡은 것일까? 서울의 주산인 북악의 좌우로는 낙산과 인왕산이 용과 호랑이가 되어 도성 안을 감싸고 그 앞으로는 남산이라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손님 산인 관악과 대좌를 한다.
북악 앞으로 품을 열어 사람을 맞을 준비를 마쳤으니 이곳이 바로 서울의 명당이 된다. 풍수에서 명당 주산은 결코 사람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런 저런 이유로 심하게 건드려 놓았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북악산의 기맥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지시들이 내려지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은 공용으로라도 북악에서 돌을 캐지 말라고 하였고, 문종이나 선조도 북악에서 돌이나 흙을 채취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으며, 중종같은 임금은 농작물의 경작까지도 금지시키고 있다.
성종 때 좌의정 윤필상은 임금에게 이런 글을 올린 일도 있다. “경복궁 주산은 산세가 약하다고 하여 나무를 가꾸어 지맥을 배양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번 전교를 받아 산등성이 안팎에다가 보호 표지(禁標)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식한 무리들이 간혹 집을 짓거나 담장을 뒤로 물려 쌓으며, 혹은 나무를 베고 밭을 개간하며 못을 만들고 우물을 파서 산의 맥을 손상시키니 마땅히 그 죄를 묻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이 산등성이를 침범하여 점유한 곳은 모두 철거시키고 나무를 심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윤필상의 지적은 마치 오늘의 청와대를 지목하여 말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닮은 데가 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내맥이 내려오는 길목으로서 풍수상 반드시 땅을 훼손치 말고 보호해야만 하는 곳이다. 그런 성격을 지닌 땅을 일본인들이 식민 통치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총독 관저를 그곳에 지어 모욕을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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