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상

chamsesang21 2008. 10. 31. 00:55

[땅의눈물땅의희망] ③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상

호남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꼽는다. 이것은 태조 26년(943년) 중신인 박술희에게 내려 준 비밀 유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니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후세 사람들의 조작이라 주장한 바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태조 자신이 직접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여기서 그 시비를 가릴 처지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설혹 태조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고 후세인들의 조작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이 실려 있는 글이라면 고려시대에 그와 같은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돌아다녔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호남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마리는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에서 호남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제8훈으로, 그 내용은 차령과 금강 이남은 지리적 형세가 배역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의 인성 또한 그러할 것인 즉 그들을 조정에 참여케 하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역의 조짐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령과 금강 이남이 과연 호남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제2훈에서는 도선 국사의 뜻을 받들라는 대목이 있는데 도선은 그 고향이 전남 영암이며 태조 또한 그의 제자에 제자 뻘 되는 경보나 윤다 같은 승려와 최지몽 같은 전남 사람을 중용하고 있는 외에 장화왕후 나주 오씨를 목포에서 맞이한 사실 등을 들어 호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의 본질에 근접한 비판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호남에서 나주, 목포, 영암 등 서남지방 일부를 제외하자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은 후백제의 견휜에 비하여 약세에 처해 있던 태조가 전략적으로 그 지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 것일 뿐 그의 본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왕건은 지방 호족과의 유대를 위하여 무려 스물아홉명의 후비를 두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일이다.

뿐만이 아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우리나라 3대 배역의 강으로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낙동강을 꼽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왕건은 그의 출신 기반인 중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령과 금강 이남의 산천을 배역의 형세라고 적시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지방이 당시로서는 최대의 산업인 농업 생산력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곡창지대란 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호남의 물길이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의 지적대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형세(산발사하·散髮四下)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을 물길이 배역의 형세를 취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인데, 금강은 북쪽으로, 동진강·만경강은 서쪽으로, 영산강은 남서쪽으로, 탐진강·섬진강은 남쪽으로, 심지어 낙동강의 한 지류인 남강의 발원지가 전북 남원의 운봉인데 여기서 남강은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반면 낙동강은 모든 물길이 하나가 되어 다대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호남은 인심이 흩어지고 영남은 인심이 뭉쳐 충신이 배출된다는 논리다.

고려 때만 하더라도 낙동강은 3대 배역수의 하나였는데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충신 배출의 물길로 승화된 것은 그 사이에 곡절이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기회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다만 물길이 흩어지는 것과 모여드는 것이 풍토와 인성 형성에 과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물길을 영호남의 물길과 비교하며 프랑스적 호남, 독일적 영남이란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 때 프랑스가 더 좋으냐 독일이 더 좋으냐를 묻는 것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영호남의 물길에 관한 풍수적 차이는 당연히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역시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역 차별과 지역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지역에 풍토적이거나 인성적인 차이는 반드시 있다. 다만 그것을 차별의 구실로 삼는데 문제가 있을 뿐이다. 본래 호남 푸대접으로 시작된 지역 차별론은 이제 김대중 정권의 등장으로 역차별 얘기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말 지루하고도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느 편을 들 생각은 없다. 호남이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는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호남 쪽에 기울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호남인들에게 배역의 참 뜻을 새기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그 단초를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시작해 보자.

선조 때 무려 천여명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그 출생에 관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불분명하고 출생지도 막연히 전주 동문 밖 또는 남문 밖이라는 설만 나돌 뿐이다. 그런데 모악산의 지맥인 제비봉 아래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그가 태어난 곳이란 얘기를 그곳 사람들은 상당히 믿고 있는 눈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라도에 대한 편견의 한 이유처럼 거론되는 것이어서 흥미를 끈다. 일찍이 이병도 박사도 정여립이 죽은 뒤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을 일시 제약, 차별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거니와, 전주시사(1986년 간행)는 이 사건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런 사건의 출발이 모악산 언저리에서 시발되었다는 것은 땅의 이치(地理)로 보아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남한 2대 신흥종교 발상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증산은 옛 구도자들이 자기를 계발하기 위하여 산으로 광야로 퇴수(退修)하였다가 힘과 영광에 가득 찬 초인으로 변모하여 동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속세로 복귀하였다는 인퇴(引退)와 복귀의 율동처럼, 드디어 서른 한살 되는 여름 큰 비가 쏟아지고 다섯마리 용이 심한 폭풍우를 불어내는 조화 바람 속에서 천지의 큰 도를 깨닫고 거칠 것이 없는 큰 차원으로 접어들어 겁액의 환난에서 몸부림치는 창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악산을 하산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의 출생지란 설이 있는 동곡마을은 증산이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오리알터와는 지척지간이다. 정여립처럼 산 기운이 사람을 낸 것인지, 강증산처럼 사람이 그런 산 기운에 이끌려 들어간 것인지는 분간키 어렵다. 하지만 정여립이 간단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를 낳을 때 아버지의 꿈에 고려 무신정권의 문을 연 정중부가 나타나 “잠시 너희집에 머물다 가겠다”고 한 대목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는 처음 율곡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훗날 스승을 공격함으로써 인품을 의심케 한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당쟁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