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눈물땅의희망] 17. 유치환 시인의 고향, 거제 둔덕면
청마의 고향, 거제 둔덕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7명 중 2명이 섬 출신이다. 대한민국이 반은 섬나라(반도)임을 나타내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좀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주도를 제외한다면 거제도는 우리나라 최대의 섬이지만 그 면적은 고작 남한 전체의 0.04%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지인 하의도는 거제도의 20분의 1 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2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면 그건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몇 년 전 서울대 전자공학과 이아무개 교수는 이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골자는 이렇다. “백두산 천지에는 40억t의 물이 고여 있다. 전기를 사용해서 12억t의 물을 해발 2155m인 천지에 끌어올리려면 20조㎾의 전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 땅기운의 원천이다. 그것을 일종의 전기적 힘으로 본 것이다. 전류는 전기 발생점 끝에서 전압이 가장 세다. 그래서 섬 사람들이 대권 도전에 성공한다”는 주장이었다. 더구나 거제도는 다리가 놓임으로써 가장 강한 기를 가진 곳이 되었고 급기야 대통령을 배출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제보다 기가 약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하의도의 경우는 어떤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거기서도 대통령은 배출되었다. 거제 출신 대통령은 하의 출신 대통령을 `독재자'라 부른다. 독재는 기가 센 사람이 하는 법인데 어찌 된 일일까? 어든 이 이론은 풍수는 아니다.
잡설은 그만하고 거제의 아름다운 땅 둔덕면을 찾아보기로 하자. 김영삼 전대통령의 고향은 장목면으로 거제의 북쪽 끝인데 비해서 둔덕은 서쪽 끝이라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거제에도 계룡산이 있고 계룡산 봉우리 중 한 이름인 국사봉도 있다는 점인데 자꾸 그쪽으로 애기를 돌리다보면 <정감록> 얘기까지 나올까봐 참기로 한다.
둔덕면은 거제에서 비교적 한적한 곳이다. 거제대교를 건너 북쪽 해안도로로 가야 신현이나 장승포 같은 큰 고을로 들어갈 수 있지만 둔덕은 남쪽 해안도로를 타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통영시를 마주 보며 달리다가 한산섬이 보이는 곳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만나는 곳이 바로 이번 목적지이다. 산방산 아래 가장 큰 마을이라 방하리가 된 것이지만 지금은 면사무소도 바닷가 하둔리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저 고즈넉한 한촌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 관심을 가진 것은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출생지이기 때문인데, 이 마을 출신으로 산방산 기슭 산방리에서 생태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덕훈 회장의 말을 듣고는 조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마의 출생지가 방하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세살 되던 해 이곳을 떠나 통영으로 나갔고 출생 신고도 그곳에서 했기 때문에 성장지는 아닌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출생지도 중요하지만 나같이 땅의 성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려서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성장지를 더 중시하기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여러 기록에 그가 통영 출신으로 나와 있는 것은 그가 태어날 당시에 거제는 통영군 관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통영 시내 남망산공원에 청마의 시비가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기야 남망산에 오르면 그의 고향이 한 눈에 잡히니 출생지와 성장지를 구분하는 자체가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청마의 생가는 문화마을이란 이름으로 복원과 기념관 건립이 추진중이다.
청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그의 시 `깃발'이 실려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훗날 어디선가 읽은 그의 `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라는 시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그 상도동 산번지 어디에서 한 굶주린 젊은 어미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 것을 독기에 받쳐 목을 졸라 죽였다고/…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테냐 죽여버린다./…엄마 다시는 밥 안달라께 살려줘.” 이어서 “그리고도 한마디 항변조차 있을 수 없이 꺼져가는 한겨레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영락없이 무수히 무수히 있을 텐데도 그 숫자나마 너는 파적거리로라도 염두에 올려 본 적이 있는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풍수라는 것을 붙잡고 땅을 말할 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했던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런 시를 쓴 사람이 어떤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한 알 수 없는 것은 그의 `행복'이란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감성이다.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나는 행복하였네라.” 굶주림에 자식을 죽인 젊은 엄마를 방치하고 있는 지식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다니, 혹시 그런 이중성이 땅에서도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산방산에 올라 방하리 일대를 조망하지만 주변은 그저 푸른 바다와 파아란 하늘뿐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주위 산들을 바라본다. 알 듯 모를 듯하다.
거제의 중심부에 있는 계룡산은 그 맥을 서쪽으로 뻗어 백암산을 만들고 이어 대봉산을 거쳐 산방산에 이르러 방하리를 이루는데, 현재의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본래는 봉황을 뜻했던 듯하다. 그래서일까 대봉산과 산방산 줄기를 방하리에서 보면 마치 봉황이 둥지를 찾아 내려오는 듯한 형국이다. 산방산에는 커다란 자갈(이곳에서는 이 돌을 몽돌이라 함)이 있어 봉황의 알 구실을 하고 대나무(산죽)가 있어 모이가 되니 안성맞춤인 셈이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죽실)를 먹고 오동나무에만 깃든다 하였으니 마을에 오동나무가 있는 것은 땅의 성격을 제대로 읽은 까닭이리라.
마을 입구는 3중으로 닫혀 있으나 조금만 비켜서면 바다가 보여 일면 허망한 구석이 있다. 게다가 안산에 해당되는 곳에 장옷을 걸쳐놓은 듯한 옷바위(화암산)가 있어 뭔가 불안한 조짐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지세에서는 힘은 들지만 진취적인 자손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는 만큼 청마의 정의감에 섬세한 정감이 깃든 것을 그 면에서는 이해할 만하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성장은 슬픔이다. 점점 커가는 자식들이 세파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고 그러면서 부모 곁을 떠나가는 것도 늙으막의 외로움이 될테니까 말이다. 정의감이 성장이라면 섬세한 외로움은 슬픔일 수밖에 없다.
답사 전에 찾은 기록에 호바위라는 것이 있어 주민에게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 좆바우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대봉산 쪽에 우뚝 솟은 바위를 가르쳐준다. 아마도 그것이 호바위일 것이다.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해롭다 하여 숲으로 그것을 보이지 않게 막았는데(이를 동수 비보라 함) 근처에 있는 어느 집안에서 자기네 선산에는 오히려 그 바위가 보여야 좋다고 하였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대로 그대로 두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것은 우리 풍수 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예인데, 마을 사람 입장에서는 좆바우가 마을 여인네에게 음탕한 풍속을 남길까 염려를 했기에 그것을 극구 가리려 했을테고 선산 임자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대로 보이도록 해두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이런 예에서는 양반과 일반 백성 사이의 알력이 개입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기서 그런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양반의 선산은 백성에게는 화근일 뿐이다. 양반 뒤치닥거리도 문제이거니와 그 집안에 초상이 나면 노역을 해야 되는 일도 귀찮기는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풍수를 빙자하여 양반들의 횡포를 막아내는 방편으로 쓰는 것이지만, 합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숲을 조성하여 막아줌으로써 염해와 풍해를 동시에 방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수 설화는 언제나 속뜻을 숨기고 비약된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깊은 지혜를 품고 있으면서도 미신 취급을 당하는 것이지만 그 지혜를 찾아내는 즐거움은 풍수학인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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