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눈물땅의희망]19. 폐광촌의 노을과 새벽
얼마 전 신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접했다. 잇단 폐광으로 극도의 침체 상태에 빠졌던 태백시가 자치단체 사이버 주식거래 사이트에서 우량 테마주로 각광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1월1일 상장된 액면가 5천원의 태백시 주가가 3월 중순 3.8배나 뛰어올랐고 이는 도청 소재지인 춘천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이란 것이다. 보도는 이를 “태백시가 폐광촌에서 고원 관광 휴양도시로 변신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1980년대 초부터 석탄은 사양산업으로 규정되어 사실상 그 존재가치조차 인정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석탄산업 합리화법이 제도적으로 폐광을 양산하는 계기가 되어 폐광촌은 사회문제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 40~50대 분들은 학창시절 주요 탄전과 매장량, 생산량 따위를 외우느라고 지리 교과목 자체에 염증을 느꼈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지하자원으로, 따라서 최대의 산업으로 각광받으며 검은 황금이란 소리까지 듣던 석탄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물론 중간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에는 총 에너지 소비량의 절반 가까이가 석탄이었고 결국 그 해 말 무연탄 파동이란 것을 겪고 난 뒤, 1971년에 이르러 석유가 에너지의 절반을 넘어서는 전환점을 겪게 된다.
한가지 신기한 사실은 석탄의 중요성이 이토록 크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가 아직도 석탄을 중요 에너지 자원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ㄱ출판사가 1998년 출판한 공통사회에는 “남한의 무연탄 산출은 연간 약 1천만t으로 국내 소비량의 90%를 차지하나, 석탄 수요의 감소에 따라 생산량이 점차 줄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지금 고3인 내 딸 아이가 배우고 있다. 참고로 1998년 우리나라 석탄 생산량은 440만t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석탄 얘기는 아니지만 같은 책에는 “1960년대 초까지 신탄이 주 에너지원”이란 표현이 있는데 신탄을 알고 있는 고등학생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지금 누가 그런 말을 쓰기나 할까? 땔나무와 숯이라고 해도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많은 학생들이 재미있어야 할 지리교과를 마구잡이로 외워야 하는 과목으로 아는 것이 교과서에도 일부 책임이 있음은 분명해 보이며 나 또한 그런 교과서의 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책임을 통감한다.
답사를 다니다 본 삼척, 태백, 문경, 정선, 영월 등지의 탄광촌들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실질적인 폐촌 상태였다. 1991년 영월군 하동면에 있는 옥동광업소를 갔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선은 전국 곳곳에 가보지 못한 곳이 별로 없다고 자부했던 내가 탄광촌의 실태를 그토록 몰랐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그 속 사정이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곳은 최근 김삿갓 무덤이 있다고 하여 꽤나 알려진 하동면 와석리 입구 맞은편에 있는 곳이다. 내가 그곳을 들어갔던 날은 마침 그곳 초등학교의 개교 기념일, 그곳 어린이들은 학교 생일날이라 불렀는데,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학교는 문을 닫고 있었다.
마을 전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 학교 어린이들과 뒷산에 올라 사진을 찍으려고 동행했을 때 나는 무심코 “학교가 놀아서 좋겠구나?”라고 말을 붙였는데 어린이들의 반응은 전혀 그게 아니었다. 휴일은 점심 급식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점심 굶는 날이고 따라서 휴일은 자신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날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로는 한창 선진국에 진입한다고 들떠 있던 시절인지라 다른 나라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물론 서울 달동네도 여러번 가보았고 실상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식 아동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이 학교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 뜻밖이었다는 뜻이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마을 전경은, 속 사정을 모르고 본다면 그야말로 산 속의 별장촌을 연상케 했다. 주변 경치는 늦봄의 녹음 속에서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속이야 어떻든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 지붕들은 색색으로 칠한 슬레이트들이라 별장이란 말이 무색치 않았다. 나는 여기서 글을 통해서만 듣던 서양 지리학의 경관론적 전통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것인지를 몸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항공사진이나 지도를 보고 천상(天上)의 지리학을 했던 것이다. 한번도 그 속을 답사하지도 않고 가로망이 격자형이니 방사형이니 규정을 지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런 사정은 사북, 고한, 함백, 황지, 도계 등 탄광촌 전역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규모가 작은 곳일수록 형편이 더 나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정선군 아우라지에서 들어가는 구절리 계곡에서 목격한 일에 국한되지만 그 시커멓던 계곡물이 탄광을 폐쇄하고 불과 5년도 안되어 파란 물 색깔을 되찾고 있더라는 것이다. 정말 축복받은 자연이다. 땅은 여성이자 어머니이다. 그것이 풍수가의 주장이다. 그런데 폐광촌을 보면 철저히 반풍수적이다. 필요하면 존중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린다. 인간이 어머니를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임어당의 얘기가 떠오른다. “서양인들이 여성을 섹스의 짝으로만 볼 뿐 어머니로 보는 시각이 애초부터 결여되어 있다”는. 섹스는 끝나면 그만이다. 우리가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시각과도 같다. 아직은 구절리에 국한된 것이지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어머니를, 축복받은 자연을 더 이상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여기에 도박장을 개설하여 주민들의 생계 수단으로 삼고자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도박은 이유가 어디 있건 인간성을 황폐화시킨다. 주민들로서야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수단으로 카지노를 들고 나왔겠지만 정책 결정자의 안목은 너무나 짧다. 아마도 숫자의 마력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번 연재에서 가끔 인용했던 마빈 헤리스는 이런 비유로 현대인의 숫자 집착증을 질타한 바 있다. “오진으로 엉뚱한 장기를 제거하여 그 환자가 죽었을 때, 담당 의사의 수수료는 의료직 분야의 생산량에 보태지고 장례비는 장의사와 무덤 파는 인부의 생산량에 포함된다.” 실수로 사람이 죽었는데 경제 지표는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좀 지나친 인용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폐광촌을 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인간성의 황폐화를 부를 가능성이 짙은 카지노를 등장시키다니, 탄광으로 어머니인 땅을 버려놓아 버리고 이제 와서 그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다시 도박으로 그 땅의 자식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꼴이다. 이런 지경이니 풍수 말세론이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탄광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개가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개를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란 구절을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잡아 먹기 위하여 기르는 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먹을 때 먹더라도 살아 있는 개를 사랑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버렸든, 어머니에게서 버림을 받았든 탄광촌 사람들은 외롭다. 그래서 그곳에 개가 많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사람도 탄광촌의 개 신세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쓸 만하면 쓰고 용도가 다하면 그대로 폐기 처분이다. 아이엠에프 사태를 통하여 우리는 그런 현실을 직접 보고 겪지 않았던가? 그저 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육체를 제물로 삼지는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심하자. 사태가 악화되면 탄광촌의 개 신세가 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다시 석탄을 캘 수도 없고 도박을 권장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풍수 비보책으로 카지노 입구에 이런 팻말을 붙이도록 법제화하는 것은 어떨까? “도박은 당신과 당신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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