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자생풍수의 나아갈 길

chamsesang21 2008. 11. 5. 13:08

[땅의눈물땅의희망] 20. 자생풍수의 나아갈 길

땅에 대한 사랑, 이것이 풍수의 본령이다. 그런데 얼마 전 철학자 이정우의 <인간의 얼굴>이란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인용하면, “복제인간은 사고도 하고 정서 작용도 한다. 그러나 그가 인간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는 것은 사랑할 때이다. (그러나) 사랑은 유기체에게 해롭다. 토끼에게 연민을 느끼는 호랑이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적에게 동정을 느끼는 군인은 총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강하고 독한 자가 선량하고 부드러운 자를 지배한다. 이것이 우주의 차가운 법칙이다”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땅을 유기체로 보며 그에 대한 사랑을 가장 중시하는 풍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가 주장하는 바는 새로운 지식인상의 정립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인용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사랑에 관한 정의는 분명히 해두기 위하여 적시한 것이다.

풍수적 삶의 종말은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연민이나 동정이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상호교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다. 서로를 살리는 것(相生)이 사랑이지 서로를 죽이는 것(相殺)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상처받은 사람을 고쳐주고 감싸주는 것은 측은지심의 발로이니 사랑의 한 부분일 수는 있다. 병든 땅을 고쳐주는 일 역시 유가가 지적하는 네가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측은지심처럼 그 자체로서 미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뭔가가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과 그 이해득실을 따지지는 않더라도 주고 받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자식, 땅과 인간은 시비곡직을 따지지는 않지만 뭔가의 교류가 있다. 일방적인 시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야 자식인 사람은 어머니인 땅에 대해서 무조건 달라고 떼만 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못된 자식은 어머니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도 일방적 시혜로서의 사랑은 곤란하다. 지금 땅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로 그 버릇없는 자식들의 행태를 닮아버렸다. 그저 얻어 가질 생각만 하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으면 은혜를 잊거나, 아주 막된 인간은 내다버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렇게 비인간적인 양태가 나타나기 전에 고쳐야 할 텐데 나는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가 그 사상적 기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재에서 자세히 언급할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여러 간행물을 통해서 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서의 자생풍수 예들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다. 오히려 이제 자생풍수는 연구의 걸음마를 떼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풍수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직접 보고 겪었다. 겉으로는 풍수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풍수를 받아들이는 태도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북한 김일석 주석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이 공식적으로는 풍수를 배격하면서 사적으로는 그에 기울어진 혐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풍수를 비난하던 사람이 자기 개인의 일로 내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풍수는 산소 자리 잘 잡아 돌아가신 부모님 덕 보자는 이기적인 술법풍수이니 내가 주장하는 자생풍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통일 수도로 파주시 교하면을 떠올리거나 인천 신공항의 조경에 풍수적 사고를 접목시키는 일 따위는 정서적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면서도 공식적인 발표나 논문에서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전라남도 도청 이전 문제에서 서울 청와대의 북악과 대비되는 해양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며 무안군 삼향면 남악을 추천했을 때도 무반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단법인 `목포백년회'에서 감사패와 함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곳으로 도청이 확정된 것이 풍수가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내가 1992년 <경향신문>에 발표했던 `남악 전남도청 적지설'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술법풍수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풍수를 거론한다는 것이 껄끄럽다는 것과 일부 종교계에서 풍수를 사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풍토가 작용했을 것이고, 또 한가지는 자생풍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재작년 방북 때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릉에서 자생풍수적 입지 설명을 들은 북한 학자 중 한 사람이 보인 “그렇다면 그것은 `봉건 도배들의 터잡기 땅놀음'이 아니라 `민족 지형학'이 아닌가”라는 반응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예일 듯 싶다.

나는 서구 문명의 편리함을 도외시하고 저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서구 문명의 반풍수성과 반자연성에 대해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는 쪽이다. 미군 기병대의 공격으로 궤멸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훙크파파족의 마지막 대추장이었던 `붉은 구름'은 이런 말을 했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 땅을 먹었다.” 붉은 구름의 회고를 오늘의 우리에게 대입시킨다면 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서구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과학과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반풍수적인 서구식으로 근대화시킨다고 하였고 우리 땅은 그렇게 오염되었다.”

<설심부>라는 풍수서가 있다. 눈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땅을 읊는다는 뜻일 텐데 거기에 “땅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地靈)이 사람다운 사람(人傑)을 태어나게 한다”는 구절이 있다. 생명력의 원천인 땅의 영기를 무시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파괴하는 오늘의 상황은 원천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시대에 해당된다. 지령이 없는데 인걸이 나올 까닭이 없으니 해본 소리다. 땅들이 온통 살기, 사기, 병기로 충만한데 사람의 기운이 그런 기운에 물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이리라.

지금 경북 경산대에는 유일한 풍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나 자신도 손님 교수로서 조그만 강의를 하나 하고 있지만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대학이 직업학교가 아닌 만큼 학생들의 취업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에게 자생풍수만을 가르쳐 사회에 배출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진이 철저히 자생풍수적 방향으로 학생들을 이끌어 나가리라 믿지만, 만에 하나 학생들이 돈받고 산소자리 잡아주는 풍수쟁이로 나서게 된다면 세상에 이런 딱한 일이 또 있을까.

물론 토지 평가에 있어서 풍수적 사고의 도입이라든가 관광산업에 있어서 풍수가 일정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 각자의 노력에 따라서는 전공도 살리고 생계 유지도 되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부동산 평가에 있어서는 부동산학 전문가들도 풍수적 안목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서구식 이론대로 평가를 했을 때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은 풍수가 이유더란 것이다.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잘 설명을 하는 관광산업 종사자들도 그러한 것들이 왜 거기 있어야만 하는지, 즉 입지 이유를 물으면 아는 경우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풍수적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일이겠지만 내 평소 지론은 “생활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학문이란 취미일 뿐이고 생계에 도움을 주지 않는 사상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직은 같이 고민하며 자생풍수의 현대적 해석과 그 효용성에 대해서 정리해 나갈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짧은 연재에 투박한 어투를 이겨내며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부끄러움과 함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끝> 풍수연구가·경산대 풍수학과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