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건축입문기

기술사 자격을 따기까지

chamsesang21 2008. 10. 28. 23:48

1992년 직장생활을 모회사에서 하던때였다.
대학 선배인지 고등학교선배인지는 그분이 밝히지 않았으나 사표를 던질때,"자네는 내 직접후배야"라고 그분이 한 말로보면 선배는 선배일테니까.
그 선배는 동아건설에서 11년간 근무하다 지방 건설사에 스카웃 되어 온 경우다.
기술사 자격으로 1억원의 대우와 기술이사및 회사차량 1대 지원, 월급은 92년당시 200만원정도의 대우를 받고 온 선배였다.이때 내월급이 56만원정도?
아마 내가 기술사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것이 이 경우가 계기가 된 것같다.
1학년 대학생활말 무렵에 건축과 교수로부터 기술고시 공부를 할 사람에 대한 특별 모집이 있었다. 학업을 계속하여 기술고시 지원을 할것인가, 군대를 갈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선택은 국방의 의무에 대한 무게와 기술고시 공부를 하더라도 군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술고시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기술고시와 기술사는 별개의 내용이지만 기술사가 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후에 자격증 공부를 할때 매우 어렵다는 인식만 했기 때문에 기술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막연히 "엔지니어로서 딸수만 있다면 최고의 엔지니어 자격증인 기술사 자격증을 30대 후반에나, 따기위해 공부를 해야지"라고 생각했었기때문이다(이때는제도가 바뀌기전이었다.건축기사 1급을 따고 현장경력 7년의 근무를 한후에 기술사시험을 볼 자격이 생겼지만 지금은 4년으로 바뀌었다)
기사로서 직장생활을 남다르게 하다가 96년 말 IMF체제로 접어들면서 나의 직장생활도 일시적으로 쉴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계기가 되었다. 39세나 40세에 공부를 하려고 했던 기술사자격 도전을 36세때 잠간의 휴식을 계기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6개월정도 관련서적및 인터넷을 통해(이때는 피시통신으로서 천리안이나 하이텔과같은 통신회사를 통한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정도의 인터넷시장으로서는 극히 초기 상태였다,속도도 매우 느렸으며 용량이 조금큰 자료를 다운 받으려면 상상할수 없는 시간이 소요되었다)자료를 확보하고 기출문제 중심으로 답안작성 연습을 하였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지금은 각 대도시에서 시험을 치를수 있지만 처음 내가 시험볼때는 오직 서울에서만 시험을 치를수 밖에 없어서 지방에서 살고있는 응시자는 시험을 치르기위해 상당한 시간적 심리적 불이익이 초래되었다.
시험은 4교시를 보며 각 100분의 시간이 주어지고 1교시는 용어및 내용문제와 2~4교시 시험문제는 40점 필수문제와 나머지 30점문제 3문제중 2문제를 선택해서 논술형으로 답안을 작성해야하는 대단히 힘든 시험이었다 어쨌든 처음 시험에서 나는 A4용지로 44장을 쓰고 나왔다. 나름대로 잘보았다고 생각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와 시험합격 발표만 기다렸다.그러나 보기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왜? 떨어졌을까라는 의문점이 들었다. 답안 작성을 다 했는데 떨어진 이유가 이해가 안갔다.나중에 떨어진 원인을 파악하고나서(답안 작성시 출제자의 지문내용에 맞추어 답안을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지 못한점이 그 원인이었다고 판단됨)부터 집중적으로 포인트를 맞추어 나갔고 겨울에 2달정도 서울에 있는 모 학원에 주말에 1번씩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어머니가 발코니에서 미끄러져 고관절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두번째 기술사 시험공부는 그 상태에서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다음해 6월경에 시험이 있는 상황에서 꾸준히 준비를 해야 했었지만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을수있는 사람이 없어서 처음 1달 반여동안 간병인 역할을 할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자고 어머니의 똥 오줌을 다 받아내며, 병 간호를 하던중, 다행히 목포에 계신 혼자사시는 이모가 계셔서 병간호를 부탁드렸다.이모 덕택에 놓아버린 기술사 공부를 그 덕에 다시 할수가 있었으며, 3개월정도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였다. 두번째 시험은 다행히 서울지역이 아닌 대도시(광주)에서 시험을 볼수가 있었다.
두번째 시험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답안작성을 열심히 하였다.물론 이때도 A4용지로 43장을 쓰고 나왔다. 말이 그렇지 그대로 보고 쓰라고 해도 시간내에 답안작성을 할수있을까 의문이 들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시험이었다.
이제 다시 기술사 시험에서 떨어지면 두번다시는 시험공부한다는 것이 지겨울정도였다.
1차 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기 하루전에 서울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합격 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날처럼 기쁜날은 그리 많지않을것이다.
집사람과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미래의 세상이 다 내것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2차 시험은 구술 면접으로 2분의 전문가(1분은 교수,1분은 현장실무자)가 전공및 일반적인 내용에 대해 질문하는 면접이었다.
어떤 질문이 나에게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열심히 예상 질문을 생각하면서 답변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면접시에는 예상 질문은 하나도적중한 것이 없었다.
그 사람 개개인의 이력에 �추어 그사람의 자질과 능력에대해 이 2분의 전문가들은 나에게 질문을 한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것처럼 느껴지는 떨리는 면접시험을 마치고, 드디어 99년 7월5일 최종합격을 하게 된것이다. 내가 기술사 시험에 투자한 시간은 해수로 2년이고 달수로 9개월정도였다. 참고로 2차 구술면접에서 떨어질 확률은 30%로정도이다.
단순한 형식적인 면접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드디어 기술자로서의 최고의 자격증인인 건축시공 기술사 자격증( Professional Engineer(PE)을 따게된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나에게 기술사로서의 혜택을 누리게 하지 못했다.
건설시장 개방에 대응해 기술자 자격제도가 바뀌게 되었으며, 기술사의 고유한 영역마저도 경력 10년이상만 되면 기술사로 인정한다는 인정기술사 제도가 생겼으며, 학경력자 자격제도가 생겨 시험을 보지않고 자격을 부여받은 학경력자라도 기술사가 배치될 수 있는 고유영역을 침범하게 된것이다. 기술사 자격시험을 위해 힘들게 공부했던 지난한 과정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추락할줄이야.도대체 누구에게 원망해야할것인가?
불과 7~8년전의 과거와 이렇게 세상이 뒤바뀔수가 있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