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건축입문기

기사 생활의 시작 1

chamsesang21 2008. 10. 28. 23:47

처음부터 건축기사 생활을 한것은 아니었다.이전글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졸업후 현장노동생활을 하다보니 정식 건축기사로서의 생활은 하지못했던것이다.
첫 직장(1992년 3월)은 조립식판넬 자재및 시공을 하는 공장에 취업을 하였다.제조업을 선택한 이유는 공장에서 노조를 결성해보려는 의도에서 였다. 이것은 누가 나에게 지시한것도 없고 내자신이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작은 노력의 일환이었다.
3개월여동안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공장노동자와 직원들과의 만남을 통해 친목을 유지해나갔다. 나의 뜻을 전해주면서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종일 비가 내리기 시작한날이며 그날따라 나에게 안좋은 일이 자꾸 생겼다.아니나 다를까 저녁늦게 일을 마치고 포터(1톤트럭)를 몰고 귀가를 서두르기위해 속도를 내어 달리던중, 아뿔싸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그만 도로변 전봇대에 그대로 조수석을 들이받았다.안전밸트를 맨 상태였기 때문에 다행히 몸이 튕겨나가지는 안했지만 밸트착용으로 인해 아랫배의 압박으로 허리를 피지 못할정도 였다 다행히 차만 부서지고 몸은 외상은 없었다.사후조치를 취했지만 사고 후유증으로 한달정도 고생하였고, 부서진차의 수리를 회사에서 떠안지않고(회사차였기때문) 나에게 책임을 씌웠다.-대항하였지만 먹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나는 첫 짧은 직장생활을 마칠수 밖에 없었다.순진한(?) 나의 조합 설립계획은 이것으로 끝날수밖에 없었다.
그뒤 지방 건설사에 원서를 넣자, 근무를 할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처음 자리배치를 받은곳이 김제의 모 아파트 현장이었다 골조공사가 3층정도 진행되고 있었다.어떻게 보면 건설현장에서의 정식 기사로서의 생활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볼수있다.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분위기가 별로 좋지않았다.
나의 직상관인 대리와 현장소장과의 마찰이 있어서 나의 초임기사로서의 입장이 매우 난처한 경우였다. 상관인 대리나, 현장소장 둘다 나에게 관심을 두지않았다.
학교에서 이론적인 내용을 배웠다기는 하지만 아파트 현장에서 공사진행과정,즉 공정관리를 어떻게 해야하며, 매 공정시 체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이 잡히지 안았다.
말 그대로 현장돌아가는 상황을 반장들보다도 몰랐던것이다.
그나마 상관인 대리에게 가르침을 기대했건만 철저한 스파르타형식의 지시와 명령만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현장소장도 마찬가지였다.(예전에는 현장이 군대와 거의유사한 구조였다-박정희정권과 전두환정권의 덕택이다)더군다나 작업일보를 쓰면서 담당자 결재란에 한글로판 도장을 찍은이후로 현장소장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한문으로된 도장으로 담당자 결재를 하란것이었다.어이가 없었다.그때만해도 한글을 사용(?)하는것이 마치 죄인인것처럼 느껴지던시기였다.
이문제로 현장소장과 나와의 무려 1달간의 지루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나는 결재 도장을 한문으로 팔수밖에 없었다.
또하나의 불만은 공종회의시간에 초보기사이기때문에 참석을 시키지 않는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일체 현장 돌아가는 회의 내용을 내가 알지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꼭두각시 역할밖에 하지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일외에 몇가지일로 인해 현장소장과 나와의 마찰은 증폭되어만 갔다. 3개월의 괴로운 시간이 흘러갔다.매일 술로 인간관계의 어긋남을 달랠수밖에 없었다.더이상은 이러한 관계를 지속시킬수 없어서 본사에 사표를 제출하였다.이일로 인해 급기야는 회사 회장및 사장이 현장에 나와 현장 직원들과의 일대일 면담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경리아가씨는 현장소장의 비리를 폭로하게 되었고 나자신은 일체 현장소장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함구하였다. 어쨌든 내가 모신 상관이 아니던가?
회장의 타현장으로의 발령이나, 본사 근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 초임기사 생활을 이렇게 힘들게 마쳐야만 했던것이다.
사표를 던지고 난후 주변 선배로부터 소개가 들어왔다.모 건설회사의 이사인데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자기 개인사업을 하는데 기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주었고 면담이 이루어졌으며, 보수를 종전보다 후하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유혹했다.
이것이 두번째 새로운 기사생활로서의 출발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