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에 남아있는 몇몇 유물들 중에는 조성 당시의 사격과 사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자료들이 있다. 그중 창사 연혁이 오랜 절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시루이다. 흔히 사찰에서 제작된 불기(佛器)와는 또 다른 유물인 시루는 사찰의 불교공예품들이 일반적으로 의식법구와 공양구 및 장엄구로 대별되고 있지만 시루는 그 분류에 속하지 않는 유물이기도 하다.
증(甑)이라고 표기하는 시루는 자전(字典)에서 흙으로 구워 만든 통으로 위는 크고 아래가 작으며 밑바닥에 7개의 구멍이 있고 사용할 때에는 밑바닥에 대나무를 펴서 그 위에 쌀을 채워 넣은 다음 솥에 얹은 후 찐다고 한다. 선조 32년(1599) 김장생이 중국 송대의 학자 주자의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엮은 《가례집람(家禮輯覽)》에도 시루가 질그릇으로 만든 것으로 밑바닥에 7개의 구멍이 있으며 화기(火氣)로써 익히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불의 사용에 이어 농경문화의 발달에 따른 소산물인 시루는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약 2500~기원전 2000년경의 용산문화 시대에 사용된 토제시루가 있으며, 우리의 고대 주거지 유적에서도 가끔 발굴되기도 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고시대 시루의 밑바닥 구멍은 화형(花形)으로 뚫려 있고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형태가 있으며, 또한 곡식이 구멍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엮은 칡을 깔기도 했다.
시루는 무쇠로 된 큰 솥에 쌀가루 2말들이까지 넣기도 하는 대증(大甑)과 일반적인 크기의 중형증(中形甑) 및 5홉들이 정도 넣는 소형증(小形甑)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고사를 지낼 때의 대증은 성주시루, 중형증는 터주시루로 썼고, 소형증은 조왕시루라 하여 백설기를 쪄서 다락에 놓았다고 한다. 재료별로는 질그릇 · 도제 · 동제 등이 있고, 중부 지방에서는 질그릇 시루를 많이 쓰고 남부 지방에서는 도제 시루를 많이 썼다고 한다.
사찰의 대중공양을 위해 제작되었던 시루들은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와 시호 결정에 대한 일을 맡아 보던 봉상시(奉常寺)의 내력과 업무를 정리한 책인 《태상지(太常誌)》에 실린 것과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태상지》에는 김으로 곡식을 쪄서 시루는 길이 3척 약 90㎝, 엽박(葉博) 4촌 약 13㎝인 동(銅)으로 만들며 밑바닥은 둥근 테를 가로지른 사선과 함께 투공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중 시루의 형태 또한 저부에서 상부로 올라가면서 완만하게 넓어지고 구부(口部)에는 한 단의 턱이 있으며 약간 외반된 이중구연을 지닌 원통형이다. 시루 내저(內底)의 투조(透彫)는 다소 장식성이 있으나 여지(餘地)에는 특별한 의장이 없고 외동(外胴)에 약간씩 사이를 둔 2~3조의 융기된 횡선대(橫線帶)와 2~4개의 손잡이를 부착하고 있다. 특히 시루의 구연단에는 얇은 횡선대를 두른 후 그 아래에 타정(打釘) 수법으로 점각된 명문을 새기기도 하였다.
사찰의 시루는 솥과 대증, 중증, 소증을 다 갖춘 것은 없고, 솥과 대증, 또는 대증과 중형증, 중형증 등으로 남아있다. 양산 통도사 시루의 경우 조선 효종 10년(1659)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루 아래에 놓이던 무쇠 솥인 철부(鐵釜)도 함께 남아있다. 이 청동 시루는 4곳에 손잡이가 있는 높이 73㎝, 지름 123㎝, 무게 350근에 달하는 대증인데 통도사의 600여명의 승려가 이 시루에 떡과 밥을 쪄서 먹었다고 전해진다.
< 그림 1) 통도사 시루 >
부산 범어사 시루의 경우에는 대형 시루뿐만 아니라 동 시대에 제작된 같은 모양의 중형증을 더불어 갖고 있기도 하다. 대형 시루의 내저는 중앙을 가장자리보다 8cm가량 높게 한 후 구상(球狀)을 취하여 무게압을 분산하고 증기의 유통을 쉽게 한 후 투조된 3조의 원권환(圓圈環)을 두르고 중심 환(環)에서 다음 환으로 방사상(放射狀)의 연결판을 12개씩 두었으며 그 다음 환과 내벽(內壁)으로는 연결판을 각각 엇갈리게 배치하였고, 내저의 가장자리는 내벽에 12개의 동자판을 붙여 공간을 정리하고 있다.
< 그림 2) 범어사 시루 >
범어사 시루는 통도사의 시루보다 5년 늦은 조선 현종 3년(1664)에 제작된 것이고 지역적으로도 가까워 동일 인물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통도사의 시루가 구경이 123cm인데 비해 범어사의 것은 110cm로 조금 작은데 이는 당시 사격이나 사세의 차이로 보인다. 그리고 남해 화방사에도 2점의 중형증이 유존되고 있는데 앞의 두 사찰에 비해 사격이 낮은 위치에 있기에 그 크기와 제작수법 등에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 그림 3) 남해 화방사 시루 >
사찰의 시루들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 불사(佛事)의 하나로 제작되고 있다. 특히 이들 불사는 중·서인의 발복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양반 계층이 유교적인데 비하여 기층민들의 내세관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같은 현상은 일반적으로 조선조 중·후기의 법화경 간행의 법공양에 있어서도 상궁이나 천민들이 중심 시주자였던 점과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되어진다.
민가에 있었더라면 이미 고철로 취급되어 오래전 멸실되었을 법한 이 시루들이 심심치 않게 몇몇 고찰의 사중에 멸실되지 않고 전해져 오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최춘욱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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