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판으로 만든 갑옷
철갑의 찰갑편札甲片은 고구려에서도 여러 점이 발견되었고, 신라·가야 지역에서는 말 혹은 말과 무사가 입었던 철갑이 세트로 발견되었다. 금년 6월에도 경주 쪽셈 지구에서 개마무사의 철갑 세트가 1,5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갑옷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갑옷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중반 경부터 철제갑옷이 만들어졌다. 고분벽화에서는 4세기 전반부터 고구려 병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분벽화에 그려진 갑주는 대부분 철鐵로 된 찰갑札甲으로 만들어졌다. 찰갑은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두들겨 만든 단조철 즉 강철이다.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는 사람뿐 아니라 말까지도 갑주로 무장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개마총에는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라 하여, 철갑으로 무장한 말을 ‘개마鎧馬’라 기록하고 있다. 말과 병사가 철제갑주鐵製甲와 장창으로 중무장한 개마장창기병鎧馬長槍騎兵이야말로 상대편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줄 뿐 아니라 적군의 살상능력을 현저히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당시의 전쟁양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중장기병重裝騎兵’이라고도 하는데 대중들에 어필하거나 게임이나 영화를 통해 세계 시장에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철갑기병鐵甲騎兵이라 부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말도 갑옷을 입었다
말갑옷은 말투구(마면갑), 말갑옷(마갑), 말장구(마구)로 이루어져 있다. 말투구는 말의 머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모양으로 오려서 둥그렇게 감싸 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 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다. 말의 눈 부분은 원형으로 오려내었고, 볼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의 볼막이를 만들었다. 말귀부분에는 귀막이를 달았는데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꽃잎모양을 만들었다. 삼실총, 마선구1호분, 쌍영총, 개마총 등의 벽화에 그려진 개마와 철령 유적에서 나온 개마모형에서 이러한 말투구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이나 약수리고분에 보이는 말투구의 귀막이는 둥근 형태를 띠고 있으며, 덕흥리고분, 삼실총, 마선구1호분, 쌍영총, 개마총의 말투구 귀막이는 3개의 꽃잎모양으로 되었고, 그 위에 술이나 댕기, 새 깃털과 같은 치레걸이들이 꽂혀있다.
말갑옷은 말목부분과 몸통부분을 다 씌우고 아래는 말발굽을 제외한 다리부분을 다 가릴 수 있도록 길게 내렸으며 밑에는 톱날형의 두꺼운 천을 대었다. 말꼬리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였으며 칼이나 창에 의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말잔등 부분에는 갑옷을 2중으로 덧대었다. 말장구는 일반기병들이 사용하는 마구와 같이 사람이 말에 타기 위한 안장과 등자 및 그것을 장치하기 위한 말띠와 띠고리, 말을 부리기 위한 자갈과 굴레, 고삐와 행엽 그리고 행엽, 운주, 방울, 기발대를 비롯한 장식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마무사는 손에 긴 창을 들고 있다. 말을 탄 적의 기병이나 근거리에서 달려드는 적의 보병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긴 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을 것이다. 들고 있던 창을 놓치거나 근거리에서 적을 상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개마무사
영락 18년(408)에 조영된 덕흥리고분에는 계현령이 쇠뇌를 들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중장기병대가 그려져 있다. 광개토왕대의 또 다른 벽화고분으로 약수리고분이 있다. 이 고분에 보이는 행렬도는 안악 3호분의 그것에 비하여 빈약하다.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서는 좌우 각기 3열의 병사들이 주인공을 호위하고 있으나, 약수리고분의 벽화에서는 좌우 1열의 병사들이 주인공을 호위하고 있다. 안악 3호분에 보이는 궁대弓隊는 약수리고분벽화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약수리고분벽화의 주인공이 안악 3호분벽화의 주인공에 비하여 지위가 낮았음을 의미한다. 지위가 낮음에도 약수리고분벽화는 찰갑으로 무장한 개마鎧馬의 숫자(14)가 안악 3호분(8)에 비하여 두 배 가까이 많다. 이는 바로 5세기 초 약수리고분 단계에 이르면, 고구려의 일반 병사들도 갑주甲와 개마로 상당수 중무장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5세기이후 고구려군은 모두 개마무사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약수리고분벽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약수리고분벽화에 보면, 말을 탄 사람 가운데 20명은 갑주와 개마로 무장한 병사가 아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기병 가운데 절반정도는 여전히 갑주와 개마로 무장하지 않았다. 기병의 가장 효율적인 사용은 궤멸되어 도주하는 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개마무사는 경기병輕騎兵에 비해 질주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퇴각할 시기에 적의 경기병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전투에서 인명피해의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때 발생한다. 반대로 반격을 가하는 측에서 적군을 추격하는 데는 경기병이 질주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유리하다. 당연히 적을 반격하기 위한 경기병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 고분벽화에 중무장을 하지 않은 경기병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확장의 위력은 개마무사에서 나왔다
개마무사는 강력한 철갑장비에 의거하여 적과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격전선에서는 전투대형의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가 되었다. 비록 신라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백제군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관창官昌이 갑마甲馬와 단창單槍으로 적진을 돌파해 들어가 싸우다가 붙잡혔는데,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나이가 어리고 용감한 것을 사랑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관창의 갑옷을 벗겨보고 나이가 어린 것을 알았다는 사실은 관창이 얼굴까지도 가리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국군이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공격을 망설일 때, 적진을 돌파하여 적의 전열을 흩트리는데 개마무사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고구려고분벽화에서는 팔청리고분과 대안리1호분 벽화에 보면 기마대열의 앞에 항상 중장기병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방어전에서는 개마무사가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는 방호벽의 역할을 하였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의 행렬도에서 왕과 귀족의 수레 제일 바깥 열에 개마무사가 줄지어 행군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결국 이들 벽화는 전투시나 행군시에 개마무사가 항상 전면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개마무사만으로 하지는 않는다. 개마무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의 전투대열을 무너트려 혼란에 빠뜨리면 빠른 경비병과 보병이 달려가서 달아나는 적을 공격해야 한다. 전쟁에서는 날아오는 적의 화살이나 총알을 무릅쓰고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가 필요하다. 현대전투에서도 방탄조끼를 입고 적진을 돌파하는 병사와 그렇지 않은 병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장갑차를 보유한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 사이에도 전투력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탱크가 필요 없다던 한국전에서 소련군 탱크가 보여준 위력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고대의 전투에서는 방탄조끼와 장갑차의 역할을 철갑과 개마무사가 담당하였다. 고구려는 바로 이 철갑을 입은 개마무사를 앞세우고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던 것이다.
글·이인철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사진·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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