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1668-1715)는 18세기 초에 활약했던 근기남인계 문인서화가이다. 그는 조선 중기 회화를 계승하면서 풍속화와 서양화법을 선구적으로 시도하고 남종화법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독자적인 회화이론을 펼친 화론가이자 서화비평가였다. 그뿐 아니라 경학, 제자백가, 예학, 음악, 패관소설을 비롯하여, 병법, 농사, 지리, 수학, 의학, 금석학, 천문 등 실용적인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검을 찬 여인이 공중을 나는 모습을 소재로 한 <여협도(女俠圖)>를 두 작품 남겼다. 여협은 ‘의협심이 있는 여성’으로 원수를 갚거나 자객활동을 하는 등의 협행을 행한다. 무술 능력을 바탕으로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의협심이 강한 여인의 영웅성을 드러낸 여협도는 조선시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매우 파격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윤두서 이전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소재로 새로운 회화 영역의 확보 면에서도 주목된다. 이 여협도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전기소설의 중흥기인 당나라 때에는 「섭은낭(?隱娘)」, 「홍선전(紅線傳)」, 「사소아전(謝小兒傳)」 등과 같은 여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 소설들은 각각 송나라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재수록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섭은낭」, 「홍선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섭은낭은 섭봉의 딸로 열 살 되던 해에 한 여승에게 납치되어 5년 동안 심산에서 검술을 익히고, 약물을 복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새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초인적인 온갖 무예와 도술을 전수받은 후 스승의 말에 따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처치하였다. 그 후 위(魏) 지역의 관장이 그녀를 진허(陳許)절도사 유창예(劉昌裔)의 암살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섭은낭은 유창예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오히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자객들로부터 그를 보호하였다.
홍선은 당 노주절도사(潞州節度使) 설숭(薛嵩)의 여종으로 경사에 능통했다. 설숭과 인척관계인 위박(魏博)절도사 전승사(田承嗣)가 욕심을 품고 몰래 군사를 길러 노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설숭이 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자 홍선은 그날 밤 적진인 위박성으로 갈 차비를 하였다. 홍선은 머리를 빗어 묶어 어만(烏蠻)의 상투를 만들어 참새를 조각한 황금 비녀를 꽂고, 가슴에는 용의 무늬가 새겨진 비수를 차고 이마에 태을신(太乙神)의 이름을 붙이고 적진으로 향했다. 홍선은 한밤중 되기 2각 전에 전승사의 막사에 도착하여 갑사(甲士) 300인이 호위하는 뚫고 침실에 들어가 황금상자(金盒)만 훔쳐 새벽에 다시 돌아왔다. 설숭은 새벽에 사신을 파견하여 훔쳐온 황금상자를 편지와 함께 위박성으로 보냈다. 전승사는 이를 받고 놀라면서 인척관계에 있는 설숭을 헤치려 한 잘못을 뉘우쳤다.
17세기 전반 경에 명사대가인 구영(仇英)이 그린 <여협도>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구영의 <여협도>는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소장하였고, 이를 이식(李植, 1584-1647), 장유(張維, 1587-1638), 이명한(李明漢, 1595-1646) 등이 감상하고 발문을 쓴 기록이 남아 있다. 이식은 1633년에 이 그림을 감상하면서 “의기(義氣)가 없는 사내를 경계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평했다. 장유는 “협은 모두 남자와 관련된 것인데, 구영이 유독 여협을 그린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이명한은 구영이 당나라 여협인 섭은낭을 소재로 그리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구영의 <여협도>는 이상에서 언급한 세 기록만으로는 어떤 여협을 그렸는지 알 수 없어 윤두서의 여협도와의 영향관계를 파악하기 힘들다.
조선 중기에 유입된 또 하나의 여협도는 조선에 온 중국인 직업화가 맹영광(孟永光)이 1640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패검미인도(佩劍美人圖)>이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있는 이 여협은 지금까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검을 등 뒤로 메고 참새를 조각한 황금 비녀를 꽂은 모습을 하고 있어 홍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상적으로 윤두서의 여협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조선의 문인화가 신범화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협도> 역시 자리 위에 앉아 있는 미인의 모습으로 윤두서의 여협도와 다르다.
윤두서의 여협도는 다양한 중국출판물의 독서취향을 반영한 예로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중국 당나라 때의 여협인 홍선이며, 이 소재를 그리게 된 경로는 『태평광기(太平廣記)』와 『성명잡극(盛明雜劇)』으로 파악된다. 「홍선전」은 『태평광기』 권195 에 재수록되어 있다. 윤두서는 이 두 책을 읽고 홍선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협도>의 주인공은 검을 가슴의 앞쪽에 멘 채 오른손에 상자를 들고 공중을 날고 있으며, 이마에 타원모양의 무언가가 부착되어 있어 「홍선전」의 내용과 부합된다(그림1, 2). 이 장면은 홍선이 적진인 전승사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황금상자를 훔쳐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이마에 붙은 타원모양의 상징물은 태을신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윤두서가 그린 홍선은 명대 잡극을 모아놓은 『성명잡극삽십종(盛明雜劇三十種)』 중 양진어(梁辰魚)의 「홍선녀(紅線女)」에 실린 삽도 중 하나인 <홍선녀가 밤에 화금상자를 훔치다(紅線女夜竊黃金盒)〉와도 상관성이 있다(도3, 4). 양진어의 「홍선녀」에 실린 삽도에는 위박절도사 전승사의 막사에서 금합을 훔쳐 구름을 타고 가는 홍선과 막사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전승사와 시종들을 담고 있다. 오른손에 금합을 들고 하늘을 나는 홍선의 모습, 홍선의 발밑에 깃발 등은 윤두서의 <여협도>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태평광기』와 명대 잡극인 「홍선녀」를 읽으면서 여협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유형의 여협도를 재창조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물첩》에 실린 <여협도>는 검을 찬 여인이 밤중에 공중부양하여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 멀리 성문이 보인 점, 이마 윗부분에 흰색 띠가 보인 점 등으로 보아 역시 홍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도5, 6). 이 장면은 홍선이 적진인 위박성을 향해 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윤두서가 사망한 1715년 전후한 시기에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는 여협 이야기가 크게 유행하여 이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소설이 성행하게 된 배경에는 사대부들의 중국 서사물의 독서경험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협에 대한 관심의 고조 등이 지적된 바 있다.
윤두서는 중국 문학에 나오는 수많은 검객들과 검녀들 중에 왜 홍선을 소재로 삼았을까?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에는 경신(1680), 기사(1689), 갑술(1694)환국으로 남인과 서인의 일진일퇴가 반복되면서 숙청과 보복이 속출되었다. 남인의 핵심 가문출신이었던 그는 당쟁의 화를 입은 당사자였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절도사들의 싸움을 중재시킨 홍선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 상대 당파의 인물을 과감하게 숙청하는 위선적 사대부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그는 홍선과 같은 현명한 여협이 등장하기를 염원하면서 이 소재를 그렸던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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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維, 「仇十洲女俠圖跋」, 『谿谷集』 卷3.
李明漢, 「仇氏女俠圖跋」, 『白洲集』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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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준, 「내조 중국인 화가 맹영광」, 『한국 회화사 연구』, 시공사, 2000.
鄭?暻, 「唐代俠義小說 속의 女俠」, 『中國語文學誌』 12, 중국어문학회, 2002.
▲ 문화재청 무안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차미애 감정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