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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재발견 18 >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는 4불여(不如)의 고장으로 전해진다. ‘수령으로 온 벼슬아치는 토박이 아전만 못하고, 아전들은 기생만 못하고, 기생들은 음률풍류만 못하고, 음률은 음식만 못하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전주가 음식의 고장임을 알리는 한 예다.
음식 이름 앞에는 ‘전주’라는 글자 식재전주(食在全州). 전통적으로 전주는 음식의 재료가 유명했다. 전라도 중심지인 전주는 해산물이나 생선(전주천의 모래무지·서해의 조기), 젓갈류(순창 고추장·곰소 젓갈), 산채나 나물(미나리·콩나물·열무), 곡식(김제평야) 등의 공급이 수월했고, 주변에 너른 들판도 많아 부유한 계층이 많았다. 따라서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전주로 모여, 풍류가 깃든 음식으로 이어졌다.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전주백반, 전주한정식, 전주돌솥밥, 전주오모가리탕, 전주막걸리 등은 그 이름만으로도 전주의 상징이 되어 있으며, 음식 이름 앞에 ‘전주’라는 글자가 들어가야 제 맛을 낸다. 이외에도 독특한 음식들이 많다. 말린 애호박 혹은 고구마순 말린 것에 들깨를 갈아서 넣은 들깨죽, 토란국, 홍어회, 상어꽂이, 홍어찜, 모주 등은 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 지역 음식의 독특함을 알리는 데 부족함이 없으며, 맛깔 나는 황석어나 멸치젓갈을 듬뿍 사용하는 김치는 타 지역에서 맛볼 수 없는 감칠맛을 준다.
‘맛의 게미가 있다’ 전주 음식의 차이는 또한 향신 조미료의 독특함에 있다. 전주의 유명한 음식점들은 대개 몇 년씩 묵은 간장을 최고의 자랑으로 꼽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종손 집에는 대가(大家)만의 장류 풍습을 갖고 있다. 장맛이 단 집에 복도 많다. 전주 음식에는 ‘게미’가 있다. 게미는 그 음식에 녹아있는 독특한 맛의 전라도식 표현. 전라도 말로 손맛을 “맛의 게미가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주는 심성 고운 여인네들의 섬세한 손맛을 자랑해왔다. 전주 음식 맛의 바탕은 기린봉을 수맥(水脈)으로 한 전주 물맛에 있을 것이고, 모든 음식의 간을 좌우하는 장맛에 있을 것이며, 갖은 양념을 섞어 조리하는 전주 여인들의 손끝에 있는 것이다.
글 / 최기우 (극작가 · 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
추천! 전주의 맛집
값까지 저렴한 ‘보신’ 우거지국 “효자동은 어디나 무조건 맛있는 집”이라고 주장하는 효자문화의집 김선태 관장은 자녀를 챙기느라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 ‘보신’을 위해 전주역사박물관 앞 <고당>의 우거지국을 챙긴다. “우거지나 국물이나 찬이나 밀쳐둘 것 없고 남길 것 없어요. 상차림보고, 계산서 보면 값도 저렴한 편이죠. 저와 같은 서민들에게 무척 고마운 일입니다.” 이 곳 우거지국 예찬은 전주역사박물관 정훈 학예사도 마찬가지. “박물관 근처는 음식점이 별로 없지만, 하나같이 맛은 좋다”면서 점심에 맞춰오는 손님들에게 먼저 소개하는 음식이란다.
보기에도 푸짐한 ‘국시’ “방송 일을 하다보면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아서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는 김선경 전 JTV방송작가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날, 20대 후배작가들에게 ‘모셔져’가는 곳은 전북대 구정문 앞 레스토랑 <팀>. 게스트들을 ‘모시고’ 가는 곳은 전북대 신정문앞 국수전문점 <정둔면옥>이다. “팀은 젊어서 좋아요. 정둔면옥에서는 잔치국시나 닭곰국시를 먹는 데, 우선 보기에도 푸짐한데다 닭고기와 국수, 밥 등 여러 가지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같아요. 진하면서도 담백하고 얼큰한 국물도 그렇구요.”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근무하는 전북연극협회 류경호 회장은 주변 음식점을 선호한다. 그 중 첫 손으로 꼽는 곳은 전북은행본점 옆 <봉이설렁탕>이다. “가깝고, 찾기 쉽고, 맛있고, 푸짐하고….” 간단히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는 전북대학병원 맞은편 <이연국수>를 자주 가는데, “국수를 먹으며 청양고추를 된장 찍어먹는 것이 좋아서”라고.
청주병에 담긴 생맥주, 양은 ‘벤또’, 주황색 식판 전주국제영화제 성기석 사무국장이 밤에 찾는 곳은 동문사거리 <별들의 고향>이다. “고기도 있고 찌개도 있고, 밥과 술 다 되니까 더 좋죠. 주인 아저씨가 음식을 잘해서 돼지고기를 숭숭 넣은 김치찌개든 참치찌개든 다 맛있어요. 비 오는 날은 특히 ‘강추’지요. 그곳에 가면 낡은 것에 대한 정겨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뭐 이런 게 좋아서….”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부대행사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이 곳은 시골 초등학교 교실 같은 바닥에 나무로 만든 탁자와 연탄난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실내 벽엔 빛바랜 신문지가 날려 쓴 낙서들과 함께 덕지덕지 누더기처럼 붙어있다. 실내가 백열등 불빛이라 좀 어둡지만, ‘조명발’은 최상이다. 이 곳 명물은 계란 프라이가 얹어진 양은 도시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집 ‘벤또’는 보는 이를 미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멸치와 고추장, 오이와 당근, 건빵 등이 담겨 기본안주로 내어지는 주황색 식판과 흑갈색 청주병(정종병)에 담아주는 생맥주도 눈여겨봐야 한다. 흑갈색 생맥주병은 “술자리 예절을 위한 설정”이다. 실제로 병이 무거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두 손으로 따를 수 밖에 없다.
선택이 힘겨운 전주음식 프리랜서 기자인 이경선씨는 전주음식 추종자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손바닥만 한 장어요리의 진수는 <오수장어>, 매콤달콤 해물찜요리의 결정체는 <청산도아구>, 회에 집중하는 사람은 <계화도 포마집>, 회에 앞서 나오는 갖은 요리를 더 반기는 사람은 <해삼집>이다. 특히 <계화도 포마집>은 묵은 김치에 싸먹는 회 맛이 일품이란다. “전주는 다른 지역에서 무척 부러워할 맛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그 선택은 힘겹지만 허투루 고르지만 않는다면 미각을 시작으로 오감이 움직여서, 행복을 만날 수 있답니다. 달콤한 음식사냥을 위해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많은 전주는 행복도시!” <땅골>에서는 단 돈 5천원이면 한정식 백반의 대향연을 만날 수 있다. 조미료 맛이 전혀 나지 않는 밑반찬과 청국장이 끝내준단다. 고구마순을 잔뜩 넣어 감자탕을 끓이는 <육일식당>은 은근히 젓가락이 자주 가는 특별한 맛집이다.
전주문화판에서 ‘꼼꼼녀’로 통하는 진양명숙씨는 <만선횟집>을 자주 찾는다. 추천음식은 참치회덮밥과 알탕, 내장탕. “어디를 가도 이집 참치회덮밥 맛은 못 따라가요. 식당 주인네는 오랜 세월, 이 자리에서, 일관된 메뉴로, 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각양각색의 ‘스끼다시’에는 정성이 묻어난답니다. 테이블이 많지 않아서 때로는 돌아서 나올 때도 있으니까, 행운이 따라야 이 집 회덮밥 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주음식이면 이 정도는 돼야” 우진문화공간 김선희 실장은 <가족회관> 마니아다. “비빔밥집이지만 반찬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맛이 배인 작품입니다. 가족회관의 비빔밥과 김장아찌, 연근조림, 멸치강정, 더덕장아찌…. 전주음식이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인데, 패스트푸드며 시간과 공임이 들지 않은 가벼운 음식천지에서 단연 압권인 음식입니다.” 김실장의 말처럼 이 집은 어지간한 일반 가정집보다 더 좋은 재료를 쓰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향토전통음식 전주비빔밥 지정업소 1-1호’인 가족회관의 찬(饌)은 많은 가짓수와 어느 하나 밀쳐둘 수 없는 맛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찬이 투가리(옹기)가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계란찜이다. 이 곳 계란찜은 계란의 성질을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부풀린다. 불 조절에 유의하며, 거품기로 돌리다가 뻑뻑해질 때까지 저어주면서 만들기 때문이다.
'갈비가 물에 빠진 날‘ 디자인 소울 조성휘 대표가 추천한 곳은 최근 전라도 곳곳을 체인점으로 물들이고 있는 <남노갈비>의 ‘물갈비’다. “입맛이 까칠하고 기운이 없다면 남노갈비에 가보세요. 보글보글 끓여낸 푸짐한 갈비를 상추에 싸 먹으면 입맛이 저절로 살아납니다. 갈비 전골과 비슷한 조리 방법이지만, 반세기를지켜온 ‘물갈비’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죠.” 끓일수록 쫄깃쫄깃해지는 콩나물과 당면도 이 집의 자랑이다. 당면과 콩나물은 언제든지 ‘덤’이 가능하다. 남은 국물이 있다면 밥을 넣어 비벼 먹으면 금상첨화. 그래서 남노갈비는 ‘어느 것 하나 남길 것 없는 음식’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허름한 식당에서 테이블 몇 개 놓고 장사할 때 자주 찾던 손님들이, 아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오곤 해서, 3대가 함께 찾는 식당으로도 이름나 있다.
비빔밥 먹고 있으면 외지 사람 전북일보 은수정 기자는 <성미당>의 삼계탕을 추천했다. “비빔밥도 맛있지만, ‘비빔밥 먹고 있으면 외지 사람이고, 삼계탕 시키면 전주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골들은 삼계탕을 최고의 메뉴로 꼽아요. 진하고 담백한 국물 맛이 좋거든요.” 삼계탕은 어느 음식점이든 쉽게 끓여낼 수 있는 여름철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다. 그래서 무난한 정도의 맛에 그치지 마련이지만, 일 년 내내 비빔밥이 비벼지고, 닭 삶는 구수한 냄새가 감도는 <성미당>은 조금 특별하다. 성미당의 삼계탕 뚝배기는 400g정도의 어린 닭을 품는다.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은 생닭. 그래서 비릿한 맛이 없고 고기도 부드럽다. 수삼과 통마늘, 대추, 녹두, 주먹밥으로 빚어놓은 찰밥을 넣은 후 다리가 엮어진 닭은, 60여 마리씩 가마솥에 넣어진 후 은근하게 끓여진다. 손님상에 낼 때는 푹 삶은 닭에 육수를 붓고 마늘과 양파, 파 그리고 음식의 독성을 제거하는 효능을 가진 녹두를 약간 넣어 3분 정도 더 끓인다. 꼭 필요한 최상급 재료만으로 담아내는 소박한 닭 한 마리. 맛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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