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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때를 놓쳐 버릴 것입니다. 날씨가 한 동안 가물어서 땅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애를 타게 했지만, 그 덕(?)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생겨나기 마련인가 봅니다. 바쁜 일정에 쫓기듯이 살다가 하루하루 말라가는 운암저수지를 보면서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만 가졌었는데, 일제시대 운암제 옛 댐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리에 짬을 내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으로 널리 알려진 섬진강댐이지만, 사실 옥정호라 불리고 있는 운암호에는 최초의 타이틀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운암수전(雲岩水電)”이라는 운암수력발전소입니다.
운암호, 최초의 타이틀 ‘운암수전’ 전라북도가 농도(農道)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전체 농업생산력 중에 얼마를 차지한지 명확한 통계로 보면 다소 의아한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만, 어떻든지 전라북도는 대대로 농업을 중요시했던 고장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작로’라는 전주-군산간의 근대화된 도로가 처음 만들어진 것도 전라북도의 농업, 쌀을 일본으로 빼내가기 위한 식민지 통치의 일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는 토지 약탈을 위한 조사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한편, 수리시설에 대한 정비를 단행하게 됩니다. 1907년 수리조합 설치요령 및 규범 규약을 발표한 뒤 1910년 전국에 63개소의 수리시설을 수축하고, 1916년에 각 도지사를 통해 제언(堤堰)ㆍ보(洑)의 수축에 관한 제반 규정을 제정하는 한편, 제언이나 보를 수축하는 기업가에게 토지를 할애하거나 물 값을 징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917년 조선수리조합력이 제정되면서 영리목적의 토지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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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총독의 절박한 희망, 운암제(雲岩隄) 식량생산의 교두보로 조선을 활용하고자 했던 일본에게 수리시설의 개선은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홍수와 가뭄과 같이 농업생산력에 직결되는 자연재해는 넘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1920년~1926년 사이에 만경강과 동진강에 매년 홍수가 발생하면서 전라북도의 수리시설 개축사업은 본격화하게 됩니다. 1924년 하천조사사업이 마무리 될 때 쯤 정무총감 시모오카(下岡)은 수해지역인 섬진강 등을 시찰한 뒤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전주천 제방공사 및 만경강ㆍ동진강 제방 공사가 이루어진 것도 바로 그 일환입니다. 하천의 제방공사와 함께 농업용수개발을 위하여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들게 됩니다. 대아저수지, 옥구저수지, 섬진저수지, 능제저수지, 왕궁저수지, 흥덕저수지 등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운암제(雲岩隄) 섬진저수지의 둑으로 1925년 11월에 기공하여 1929년 11월에 준공되었으며, 공사비는 205만 엔이었습니다. 길이 305m, 높이 33m인 운암제는 현재 섬진강댐에서 정읍 산내면으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종성리 마을 아래 쪽에 1929년에 세워진 운암호의 기념탐아래 축조되었습니다. ‘운암호’의 글씨는 1925년 당시 동진수리조합장으로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능했던 김제 성덕 출신의 오당(吾堂) 강동희(姜東曦)의 글씨라고 합니다(소공영, 「滿不溢 酌不竭」 “전라금석문” 제12호).
이외에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고토(濟藤實)가 쓴 “운암대제(雲岩大隄)”를 새겨 놓은 바위 글씨가 있는데, 이 글씨는 이번 가뭄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평소에는 반쯤 물에 잠겨 있습니다. 수리시설에 대한 사이토의 관심은 대아저수지의 글씨(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滿不溢 酌不竭])에서 알 수 있듯이 총독으로서 식량약탈기지건설을 성공리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남한에 세워진 최초의 수력발전소, 운암수전 운암제의 건설은 농업용수의 확보 이외에 또 다른 이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1월 4일자의 기사를 보면 일본의 미츠비시 회사에서 150만 엔을 출원하여 운암수전을 건설한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김제군 원평 등지에서 금광을 경영하려는 미츠비시는 금광에 사용할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운암수력전기를 설립한다는 것입니다. 1925년에 운암제의 축조가 진행되자 바로 두 해 뒤에 전력회사의 건립 논의가 나온 것입니다. 이 미츠비시의 출원은 1928년 남선수력전기주식회사의 창립과 함께 운암수력발전소의 건립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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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운암수력발전소는 일제시대 남한에 세워진 최초의 수력발전소로 1931년에 준공되어 설비용량 2,560kw의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운암제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조금만 가물어도 전기를 생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가뭄에 따른 운암제의 저수량 부족은 농업용수 뿐만이 아니라 전기생산에도 큰 차질을 보이게 되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북도를 더욱 더 약탈기지화 하기 위해서는 운암제에 대한 증개축이 불가피 하였습니다.
1940년 남조선수력전기회사에서는 3천 만원의 총공사비를 투입하여 운암저수지를 현 100척의 높이를 166척으로 높이는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제1가는 저수지를 만드는 남조선전기주식회사에서는 이를 통해 전북평야의 수리문제를 완전히 해결함과 동시에 전력부족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운암저수지의 확대는 산내면의 존폐문제와 주민의 이주문제가 사업시행의 관건이었습니다. 즉 사업이 시행될 경우 산내면의 매죽, 능교, 장금 등 세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어 가옥 400호, 답 125정보, 전 80정보가 침수되어 산내면의 총 재정 8천원에서 2천원이 감소하게 되어 면의 존폐가 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운암댐의 확장공사는 1944년 제2차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가 1948년 한전에 의해 재개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다시 사업이 재개된 것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의해서입니다. 1961년 기공식을 한 뒤 5년 만인 1965년 12월 섬진강댐이 준공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섬진강댐은 높이 64m, 길이 344.2m, 체적 41만㎡의 콘크리트 중력식댐으로 수문은 15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저수량은 466백만㎥입니다. 옥정호로 불리는 섬진강댐의 호수는 김제, 정읍, 전주 시대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멀리 계화도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
일제시대부터 운영되던 운암발전소는 1985년 3월에 폐쇄되었지만, 1940년 9월에 기공된 칠보발전소는 1945년 4월에 준공되어 시설용량 14,400kw의 전기를 생산한 이래 지금은 34,800kw의 전기를 여전히 생산하고 있습니다.
댐의 준공은 많은 사람들의 이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섬진강댐의 준공은 희망의 출발임과 동시에 어느 누군가에게는 이주의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주민의 슬픔은 단지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꿈과 희망, 좌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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