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범위 넓힌 근대문화유산 제도
즉, 근대문화유산을 “‘개화기’를 기점으로 ‘해방 전 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될 것일지라도 멸실·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개화기’란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사회로 바뀌는 시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전통적 의미의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이란 적어도 100년 이상 된 유물과 유적, 유구를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의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지금까지는 문화재의 대접을 받지 못했던 개화기 이후의 유산들도 ‘문화재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단순히 전통적 의미의 문화유산, 즉 100년 전의 것 이전으로 한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알다시피 이른바 개화기 이후 일제-해방-분단-전쟁-분단 및 냉전이라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2007년 2월부터 2009년 6월까지 군부대와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의 협조를 받아 비무장지대 일원에 대한 답사를 펼쳤다.
그런데 답사를 진행하면서 문화유산을 좁은 뜻에서만 바라봤던 필자의 어리석음에 죽비세례를 가한 것이 있으니 바로 한국전쟁과 분단, 냉전이 낳은 유산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세계 젊은이들의 넋이 묻힌 강산
돌이켜보면 한국전쟁은 매우 독특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인류가 동서냉전이라는 새로운 긴장 아래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제3차대전의 대체전’형식으로 치러야 했던 전쟁이었다.
전세계 45개국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했으며, 전쟁당사자인 남북한은 물론, 공산측인 중국, 소련, 그리고 유엔의 기치아래 모인 참전국 16개국 등 20개국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유엔군의 피해는 48만 명, 공산군(중국+북한)의 피해자는 15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당사자인 한국군과 북한군을 빼면 중국군(100만 명)과 미군(14만2000명)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군은 물론 태국, 필리핀,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 군까지 5대양 6대주 병사들이 피를 흘렸다.
미군의 경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을 비롯해 미군장성 142명의 아들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밴플리트 중장의 아들 등 35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캐슬고지(칠중성) 전투로 유명한 영국은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과 함께 영연방 제1사단을 구성했다. 터키군은 언어문제로 한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악전고투했으며,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Little Tiger)’라는 별명을 정도로 용맹을 발휘했다. 필리핀은 독립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참전을 결정했다.
인구가 20만 명에 불과했던 룩셈부르크는 소대급인 48명을 파병했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충성심으로 가득 찬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뽑았다. 파병군은 아디스아바바 인근 한국 지형과 닮은 곳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남미의 콜롬비아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파병군을 보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고사를 인용하며 참전한 중국의 경우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을 잃는 등 무려 100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고지에 얽힌 전쟁의 추억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한국전쟁의 특이한 양상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북을 오르내리며 벌인 혈전은 1년이나 지속되었다. 급기야 1951년 6월쯤, 양측은 다시 형성된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연천~철원~김화~산양리~장평리~서화~간성)에서 대치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중국 모두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의지를 잃었다. 중국은 미국의 막강화력이, 미국은 중국의 만만치 않은 재래식 군사력과, 동맹국들의 휴전압박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쌍방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협상은 결렬-진전-결렬을 반복했다. 양측은 회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힘겨루기를 벌였고, 그 무대는 지금의 비무장지대 일원이었다.
지루한 고지전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고지 이름도 쏟아졌다. 티본스테이크처럼 생겼다는 연천의 ‘티본 고지’와 갈빗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는 ‘포크찹 고지’,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풍만한 가슴을 연상시킨다 해서 이름 붙은 김화의 ‘제인러셀 고지’등의 이름은 유머러스하다. 고지 전투의 고단함과 어려움, 비참함을 이렇게 유머로 승화시킨 것이다.
반면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와,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不毛고지’, 1951년 크리스마스 때인 데도 중국군의 대공세를 받았다는 ‘크리스마스 고지’, 저격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 그리고 피바다가 되었다는 ‘피의 능선’,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단장의 능선’ 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지하만리장성 구축
전쟁이 지루한 고지전의 양상으로 이어지자 중국은 지금의 비무장지대 일원에 이른바 ‘지하 만리장성’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지하갱도 구축은 1951년 8월부터 시작돼 이듬해 12월 마무리됐다. 지하만리장성의 갱도는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총연장 250~280킬로미터, 폭 20~30킬로미터였고, 참호와 교통로까지 합한다면 총연장 4,000킬로미터에 육박한다.
단순계산 할 경우 중국군이 구축한 지하갱도, 즉 지하만리장성의 총 면적은 5,000~7,000평방킬로미터로 추정되는 것이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킬로미터의 거대한 개미집이 형성된 것 같았다. 2차대전 때의 마지노선과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엄청난 지하구조물인 것이다.
전쟁 이후,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가 설치되면서 비무장지대에는 어떤 시설물도 구축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남북한은 총 550킬로미터에 이르는 철책을 치고 요새화 했다. 비무장지대여야 할 곳이 중무장지대가 된 셈이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철원 풍천원 들판이 뻔히 보이는 평화전망대에서 찾을 수 있다.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른 궁예의 태봉국 도성 흔적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이다. 끊어진 경원선 철도와 3번국도의 희미한 자취도 엿볼 수 있다. 궁예 시절엔 도성의 주산 역할을 했던 고암산은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 고지’라는 이름이 붙었고, 서편에는 2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백마고지가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이곳이야말로 전쟁과 분단의 쓰라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유적이지 않은가. 이렇듯 지금의 비무장지대 일원은 남북분단과 통일을 바라는 상징적인 유적인 동시에 평화를 희구하는 세계인의 유산인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비무장지대
정부는 통일이 되면 비무장지대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생물권보전지역이란 비무장지대의 문화유산적 가치보다는 생태계 보전 및 활용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어떨까. 이미 살펴봤듯이 5,000~7,0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이른바 지하만리장성과 지상의 각종 군사시설물, 그리고 곳곳에 흩어진 전쟁 및 분단, 냉전의 흔적들을 합할 경우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충족시킨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려면 6가지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는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고,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이며, 중요하고 전통적인 건축양식, 건설방식의 특징적인 사례로 역행할 수 없는 사회 문화적 혹은 경제적 변혁의 영향으로 상처를 받기 쉽고,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6가지 기준 가운데 4가지를 만족시킨다.
또한 임진강·한탄강의 주상절리와 수직단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보전되거나 왜곡되기도 한 독특한 전쟁생태계를 감안한다면 유네스코 자연유산의 4가지 기준도 충족시킨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는 유네스코 유산 가운데서도 문화유산+자연유산을 합친 개념인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그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다.
글·사진 | 이기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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