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산인(山人)을 맞이하러 부러 깔아 놓은 꽃방석

chamsesang21 2009. 9. 9. 19:52

산인(山人)을 맞이하러 부러 깔아 놓은 꽃방석
지리산 바래봉과 철쭉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해마다 5월이면 어머니의 산은 능선마다 ‘꽃불’이 옮아 붙는다. 한걸음마다 마주치는 철쭉은 지천으로 깔렸어도 신물 나지 않는다. 푸짐해서 좋고, 만날수록 반갑다.
지리산 철쭉은 남원시 아영면 봉화산에서 시작된다. 4월 말에서 5월 초 철쭉이 피기 시작해 열흘 정도 지나면 남원 운봉의 바래봉으로 꽃불이 번진다. 이어 노고단과 돼지평전을 거쳐 세석평전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 달 동안 지리산 능선을 따라 온통 철쭉행렬이 이어지는 셈이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열일곱 살 숨가쁜 첫사랑을 놓치고 주저앉아서
저 혼자 징징 울다 지쳐 잠든 밤도 아닌데
회초리로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로도 못 고치는 병이 깊어서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꽃이 먼저 점령했습니다
어서 오라고
함께 이 거친 산을 넘자고
그대, 눈 속에 푹푹 빠지던 허벅지 높이만큼
그대, 조국에 입 맞추던 입술의 뜨거움만큼

                                                                               안도현의 시 「철쭉꽃」 전문 

 

바래봉으로 ‘꽃불’이 번진다

지리산의 철쭉은 대단위 군락을 이루며 핀다. 그 군락은 매년 철쭉제를 열리게 한다. 지천으로 핀 철쭉들이 가장 사랑받는 곳은 지리산 북서쪽, 잘 다듬어진 화원 같은 바래봉이다. 바래봉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어졌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편편하고 순한 산릉은 푸른 초지와 둥그스름하고 순한 능선 곳곳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가꿔놓기라도 한 것처럼 무리지어 철쭉들이 피어난다.
이곳에 철쭉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공원 관계자는 “바래봉 북서 사면에 자리 잡은 국립종축장의 면양과 소떼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먹성 좋은 면양과 소들이 봄철 수목의 새순을 모조리 먹어 치워 말라 죽었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은 입에 대지 않아 지금과 같은 ‘초원의 철쭉밭’을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바래봉 산행은 운봉읍에서 1.5㎞ 떨어진 국립종축장 입구에서 시작된다. 목장 뒤로 나 있는 산판길을 따라 오르기 때문에 산행은 수월하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쪽 차량 출입차단시설이 된 길로 간다. 이 길로 접어들면 서서히 철쭉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감이 툭, 떨어져 번진 것 같은 붉은 꽃밭이 산길 아래 목초지까지 뻗어 있다. 산판길 중간에 샘터가 있어 목을 축이며 갈 수도 있다. 산판 길이 끝나는 바래봉 정상 남서쪽 아래에 이르면 비로소 군락을 이룬 철쭉들의 행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바래봉 철쭉은 다른 지역보다 꽃이 크고 붉어 선명하며, 더 정열적이다.
지리산 뱀사골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한 ‘지리산의 시인’ 고정희(1948-1991)의 시가 떠오르는 것도 이 즈음이다.

 

산마을 사람들아
고향땅 천리 밖에 있어도
철쭉 핀 노을강 앙금이 보인다
아름답게 갈라진 노을강 허리
하늘마저 삼켜버린 노을강 강바닥
지리산 철쭉밭에 꽃비로 내리고
즈믄밤 내린 꽃비 꽃불로 타오르고
이제는 적실 수 없는 강이여
참담한 추억에 불붙는 산이여
아무도 묻지 않는 꽃의 행방
아무도 찾지 않는 물의 행방
그 한쪽을 간절하게 밝히며
하나님께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아라
영원한 천벌의 꽃불을 보아라
어느 어둠 저 불 끄고 지나랴
어느 어둠 저 불 가릴 수 있으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
완벽하게 쓰러진 성벽에 앉아
하프를 뜯으며 타오르는 사람들아
타오르다 타오르다 숯이 되는 사람들아
고향땅 천리 밖에 두 눈 감아도
이 깊고 공고한 칠흑의 계곡에
그대들 꽃불은 환히 와 닿는구나
그대들 가락은 휘어지며 와 적시는구나
세상은 추위로 깊이 잠든다 해도
타오르지 않는 것은 불이 아니기
적시지 않는 것은 강이 아니기
스스로 스스로 江岸을 물들이는
지리산 철쭉들아,
스스로 스스로 숯이 되는 사람들아
불이 그리운 자는 또한 기리고 있으리
이 세상 적시는 물과 불의 축제
火夫의 야산에서 타오르는 축제

                                                                            고정희 시인의 「철쭉祭」 전문 

 

바래봉 철쭉의 백미는 바래봉 정상에서 약 1.5㎞ 거리의 팔랑치 구간이다. 어깨를 넘는 철쭉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산비탈 전체를 가득 채우듯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난 곳도 있고, 한 길이 넘는 철쭉이 얼굴을 가린 채 시야를 어지럽히는 오밀조밀한 철쭉꽃밭도 있다. 시인들의 시(詩) 잔치도 이 즈음에서 군락을 이룬다.

 

사월의 사진 속에서
오래 나를 부른던 꽃
*운봉, 구름 마을로 들어가
바래봉을 오른다.
산신령이 새벽 산이슬로
마악 씻어낸
푸른 잎사귀들
수런수런수런대고
열하홉, 붉게 타던
진달래 가슴
여기, 활화산 되어
봉올봉올봉올
타오르고 있구나.
눈물의 열아홉살
한 생애가 다 실려와
한꺼번에 여기 폭발하고 있구나.

                                                                          우미자의 「바래봉 철쭉」 전문
(*운봉: 바래봉을 오르기 전 산 아래 마을)

 

 

나는 철쭉
너도 철쭉
나의 사랑도 철쭉
너의 사랑도 철쭉
나의 친구의 사랑도 철쭉
너의 사랑의 친구의 사랑도 철쭉
나의 친구의 사랑의 친구의 사랑도 철쭉
너의 친구의 사랑의 친구의 사랑도 철쭉
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
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
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철쭉
눈부신 하늘 밑 붉은 구름이 되어
일제히 터지는 하나의 함성!
너와 나 사이에는 오로지
철쭉뿐, 철쭉과 철쭉 사이에
꽃이 피네, 피어나네.
자잘한 저 아랫마을
사람들아, 여기 좀 보아!
철쭉, 철쭉 터지는
여기 이
純白!

                                                                          김광원의 「바래봉 철쭉」 전문

 

 

막아야 되네,

지리산 운봉자락 아래
잎만 키 높이로 내려다보는 철쭉 능선을 너머
바람 속에 오르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온 길,
그래도 할말은 남아
꽃으로 피고 있나.

천년 만년을 기다려
꽃으로 피고
보고 싶은 마음은 꽃몽오리에 담아
운봉너머 바래봉까지
아직도
그리움 남아서 꽃이 필 것이라는 데,
철쭉골 능선 오솔길에
사랑 하나
실바람 꽃타래로 지나고 있다.

함께 떠났지만
숲길에서 잃어버린
사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잃어버려
꽃무리로 피는 그리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억만년을 기다리는 것이네. 


                                                    정영자의 「철쭉꽃 무리로 피는 그리움」 전문

 

꽃몸살이 나면, 지리산으로 오시라

바래봉 정상은 지리산 전경을 북쪽에서 가장 근사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동쪽의 천왕봉에서 서쪽의
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나가 아닌 둘, 나아가 셋이 어울리고, 모두가 어깨를 걸었을 때, 더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진리를 그 굽이치는 능선들이 침묵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천혜의 요새인 바래봉은 숱한 전쟁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고려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도 이곳에 오면 무릎을 꿇었고,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쏘아 죽인 황산대첩이 펼쳐진 곳도 바래봉 기슭이다. 동학농민전쟁, 해방 후 빨치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도 전화를 입지 않았다. 한국전쟁만 해도 바로 옆 뱀사골은 쑥대밭이 되었는데 운봉은 전쟁의 상처가 없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운봉 사람들은 산이 크고, 철쭉밭이 넓다보니 각 고지별로 절정기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4월말의 절정기는 하단부(500m 안팎)의 목장 능선길. 5월초부터 10일 사이는 700m고지가 타오른다. 5일부터 15일 사이는 8부 능선(900m), 정상(1,165m)은 10일부터 20일 사이가 절정이다. 전국의 기온이 높아져서 순서도 없이 꽃이 핀다는 이상고온 시절이기에 확인은 필수다.
바래봉 철쭉이 질 무렵이면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돼지평전이 철쭉으로 물든다. 돼지평전은 세석과 함께 드넓은 평원으로 꼽힌다. 지리산의 3대 봉우리인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에 이런 초원지대가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 철쭉군락은 산길을 따라 좌우로 늘어서 있다. 이름모를 들꽃과 어우러져 꽃잔치를 벌인다. 돼지평전과 동시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세석평전의 철쭉은 지리산 10경으로 꼽힌다.
해발 1,5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수만평 이상 넓게 펼쳐진 세석의 철쭉밭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세석철쭉에는 전설이 있다. 대성골에 살던 연진이라는 여인이 산신령 몰래 음양수를 마셨다가 세석의 잔돌평전을 철쭉밭으로 가꾸라는 벌을 받았다. 연진의 손가락에서 터져 나온 핏방울이 세석의 철쭉을 붉게 물들여 지금의 세석철쭉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촛대봉은 연진이 산신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봉우리다.
매년 봄, 산을 덮어버리는 꽃물결이 눈에 어른거리며 꽃몸살이 나면, 지리산에 오시라. 철쭉이 핏빛 바다를 이룬 지리산으로.
아, 지리산에 철쭉 보러 가려거든 ‘지리산 시인’으로 불리는 이원규의 시를 읽고 오는 것이 예의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은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전문 

 


글: 최기우
사진: 남원시 문화관광과 제공

‘철쭉만 흐드러졌으면 그만’



바래봉 철쭉제


1995년 봄 운봉애향회와 운봉읍 주최로 시작된 지리산 바래봉 철쭉제는 올해 4월 25일부터 5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남원시 운봉읍 지리산 바래봉 기슭에서 열린다. 행사의 세부내용은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 산신제, 터울림농악, 사생대회, 농특산품 판매 등으로, 시민과 관광객, 등산객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 위주로 구성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지리산 야생화 및 허브꽃씨 무료 증정, 지리산 야생화 및 허브 기획전시, 면양 방목 관광 포토 이벤트, 승마현장체험, 페이스페인팅, 추억의 전통놀이 체험, 지리산 고랭지 농ㆍ특산물 전시 및 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돼 있다. 개막식은 26일 오전 10시부터 운봉읍 용산리 허브밸리. 운봉읍(063-620-6601, 6631) 홈페이지(
http://www.unbong.or.kr)에서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사실, 철쭉제는 철쭉만 흐드러졌으면 그만이다.

‘철쭉이 어디 지리산에만 있을까’

우리네 도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철쭉이기도 하다. 특히 도내 각 대학의 교정은 무리지어 핀 철쭉이 흔전만전하다.

 

스무 해 넘도록 이 길을 다녔습니다
바람도 가라앉은 적막한 녹두광장 옆
밤 깊은 흐드러진 철쭉꽃밭이
오늘은 내 무딘 눈길을 빼앗습니다
열 아흐레 이지러진 달빛이
덩달아 발길을 멈춥니다

한사코 눈길을 사로잡는
꽃잎과 달빛의 이 찰떡궁합,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지만
사람들은 해마다 늙어간다던
가물거리는 唐詩 한 구절이
오늘밤엔 바늘 끝처럼 서럽습니다

스무 해 넘도록 이곳에서 수없이
떠나간 얼굴들이
떠나가고 떠나가고 남은 세월이
볼수록 눈부시게 쓰라리게 글썽거리고
서럽거나 그립거나 쓸쓸하거나 말거나
누가 보거나 말거나 달빛은 저렇게
막무가내로 꽃잎마다 몸을 섞고 있군요

보고 싶은 뺨 비비며 묵은 그리움 섞을
그런 꽃밭이 어디 여기 뿐이냐고
밤이 깊었다고 어서 가자고
구름 비낀 달빛은 자꾸만
속 보이는 딴지를 걸어옵니다


                                                                             정양의 시 「철쭉꽃밭」 전문
녹두광장: 우석대학교 입구에 있는 넓은 잔디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