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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건축으로는 고구려시대의 안악궁, 통일신라시대의 임해전, 고려시대의 만월대, 조선시대의 경복궁과 창덕궁을 들 수 있다. 안악궁과 만월대는 궁터만 남아 있고, 임해전은 1970년대 궁터를 발굴 조사하여 건물지를 밝히고 안압지에서 발견한 건물부재의 일부를 고증자료로 하여 몇 동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조선시대의 건축으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종묘 등이 건립되었다. 이들 궁궐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된 것을 고종 때 중건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일제강점기에 훼철 되었거나 이전 되었고 지금은 궁전 중심부의 일부 전각이 남아 있어 그나마 화려하고 웅장했던 궁궐의 모습이 전래되고 있다. 이러한 건축은 모두가 건축장인들의 기술로 이룩되었으며 지금도 한국건축의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영구보존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북한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삼국시대 이래로 북쪽에 남아 있는 숨겨진 한국 궁궐권축의 신비로움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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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하고 훌륭했던 건축술을 남겨 놓았다. 경복궁의 배치는 삼국시대 이후 건축사상에 필요 불가결했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터를 잡고 건물을 지었다. 복악을 전산으로 하고 낙타산을 좌 청룡으로, 인왕산을 우 백호로, 목멱산을 안산인 남 주작으로 하여 그 중앙 심장부에 궁궐을 조영하였으니 지금도 그 의연한 자태와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다. 궁전의 배치는 남문인 광화문을 시작으로 하여 홍례문, 금천교,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을 자좌오향한 남북 축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남북 축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한 것은 새로 시작되는 왕권의 위엄과 정궁으로써의 위상을 드높히기 위함이었다. 전각은 주와 종을 가려 고저를 다르게 하였다. 한양의 어느 곳에서 보아도 가장 높고 거대한 근정전은 궁궐의 정전답게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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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경복궁의 정전 또는 법전이라 한다. 왕이 문무백관을 참석시키고 왕의 즉위식, 신년하례식, 외국사신의 영접, 왕세자의 즉위식 등 공식행사를 하는 곳이다. 넓은 마당에 문무백관이 열을 지어 서는 품계석을 세웠고, 이중의 월대를 꾸며 외곽에는 십이지신상을 배열하였다. 월대로 오르는 층계에는 봉황이 구름사이로 나는 형상을 조각하였다.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한 다포 양식으로 짜였으며 이중의 지붕이나 일층에 천장을 만들지 않고 이층까지 통층으로 하여 높다랗게 하였다. 왕위에 아무도 오를 수 없고 하늘과 통한다는 관념에서였다. 왕좌는 후면측 중앙칸에 보좌를 꾸미고 보좌 뒤에는 일월오약도로 장식하였다.
천장에는 화려한 색채의 단청을 하고 그 중앙에는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오색 구름사이에 있는 보개천장을 설치하여, 지엄한 왕좌를 꾸몄다. 지붕 위에는 용두와 상와(잡상)를 놓았다. 용은 모든 짐승의 으뜸이 되며 하늘에 오르고, 잡상은 모든 악귀와 잡신을 막아 궁궐을 보호하는 뜻이 있다. 왕궁의 전정인 근정전은 나라안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장인들이 이룩한 건축기술과 예술성의 최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궁궐은 구중궁궐이라고 한다. 경복궁 안에는 400여 동의 건물에 7,225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궐에는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상궁, 환관 등이 거주했는데 그 이원은 왕대에 따라 달랐다. 영조 때는 1,000명이 거주했고, 고종 때는 480여 명으로 줄어드는데 궁궐 안에 거주하는 인원을 조선왕조의 법전인 조선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고 이들 궁인은 내명부에서 관장하였다. 1395년 처음 지었던 궁궐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고 고종 때(1865) 다시 중건하였으나 일제의 조선총독부청사 건축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훼철 멸실되고 지금은 40여 동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궁전건물로는 근정문, 근정전과 그 행각, 사정전, 자경전, 함화당과 집경당, 집옥재, 경회루와 연지, 향원정과 연지 등이다.
이들 건물은 궁궐의 주된 건물과 누각 건물로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으면서 이 청사의 터와 관련이 없는 건물들이었다. 경복궁의 궁궐제도상으로 보아서는 다행한 일이었으나 궁궐을 경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부속건물이 대부분 인멸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로,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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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누각 건물다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왕실에서 연회를 베풀고 외국사신들을 영접하는데 사용되었다. 네모난 연목의 동쪽에 치우쳐 이층으로 지은 누각이다. 48개의 돌기둥 위에 넓은 마루를 깔고 이층 기둥을 세워 지붕을 올렸다. 대청마루는 3단으로 되고 중앙칸에 창호를 달았다. 연못 서쪽에는 두 개의 섬을 만들었는데 당주(堂洲)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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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처소였다. 여성을 위해 지은 건물로 섬세하고 장식적이나 한편 대비의 신분에 걸맞도록 위엄성도 있게 지었다. 전면에 두 칸을 돌출시켜 누각형으로 높게 띄었다.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게 한 것으로 청연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자경전의 굴뚝은 뒤쪽 담에 설치했는데 연가(煙架)라고 한다. 연가의 벽면에는 십장생을 조각한 문양전으로 장식하였다. 십장생은 해, 달, 산, 물, 돌, 소나무, 불노초, 거북, 학, 사슴 등으로 무병장수와 자손의 번성과 부귀를 상징하는 뜻이 있으며 자연숭배를 기본으로 한 도교사상에서 발생된 것이다. 궁궐은 왕실이 일정한 자리에 정착하여 정사를 보는 정궁(正과宮) 일시적으로 거처하며 정사는 보는 이궁(離宮) 또는 행궁(行宮)이 있다. 경복궁은 정궁으로 창건하였으나 정조의 개성 환궁, 임진왜란 때의 폐허, 조선총독부의 철거 등으로 수난을 당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도 창덕궁을 이궁으로 재건하여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하였다.
창덕궁은 250년 동안 궁궐로 사용되었음에도 이궁의 신세를 면치 못했고 경복궁은 빈 궁궐임에도 정궁의 위치를 지켰다. 따라서 창덕궁은 건축적으로 정궁인 경복궁과는 다른 형식으로 조영되어 이궁으로써의 특징이 있다. 이 밖에 한양도성 안에는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의 이궁과 종묘와 사직단이 있어 조선왕조의 역사를 실증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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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배치는 경복궁과는 다르게 정문으로부터 정전인 인정전과 편전, 침전이 남북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지 않고 정전으로부터 동쪽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인정전의 동쪽에 편전인 선정전이, 그 동쪽에 왕의 침전인 희정당이, 희정당의 뒤쪽에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배치된다. 이는 창덕궁의 주산인 매봉이 동쪽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궁전 건물도 산을 따라 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창덕궁은 북쪽의 산림을 후원으로 하여 매우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작은 정자를 산림속 여기 저기 세워 자연과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부용지의 축대에 앞 기둥을 세운 모양은 부용지위에 부용정이 떠 있는 듯 경관도 좋을 뿐만 아니라 아(亞)자형의 평면을 여러 개 함쳐서 짜임새 있는 정자를 세웠다. 부용지 위의 높은 대(臺) 위에 세운 주합루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합일하는 것과 같고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건물이라 하기보다는 공예품과 같은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있다. 정문인 돈화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 홍계기단 위에 세운 것과는 다르게 홍계기단을 두지 않고 지상에 이층으로 하였으며 인정전에 월대는 있으나 난간을 두르지 않았다. 이런 것은 창덕궁은 이궁이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그 역사성, 궁전건축의 장엄함, 후원 조경미의 극치 등을 인정받아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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