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고건축과 한옥, 한옥의 현대화

삼국시대 건축양식-한국고건축 박물관

chamsesang21 2009. 4. 24. 17:14

우리 나라의 건축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이전의 건축은 원시적인 기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규모가 작고 소박한 초가지붕으로 될 수혈주거(竪穴住居) 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백제는 건국 초부터, 그리고 신라는 늦어도 5세기초부터 발달된 기법과 자재로 궁궐이나 궁위(宮衛) 또는 귀족의 저택을 짓는 등, 화려한 건축양식을 채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삼국(三國)에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곳곳에 규모가 큰 사찰들이 창건되어, 한반도의 건축 양상이 일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건물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으나, 이어져 남아 있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으로 미루어 보아 구조상으로나 양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고분 구조나 고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건물도(建物圖)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평양(平壤)이나 공주(公州)·부여(扶與) 및 경주(慶州) 일대에 남아 있는 사찰과 궁전의 유적, 옛 기와와 벽돌 등 유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통일국가로 발전하게 되자, 역대의 왕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곳곳에 큰 가람(伽藍)을 짓고, 마침내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건축은 장엄하고 화려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불행히도 이들 건물의 대부분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오늘날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로는,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들 뿐이다. 그 건물 종류도 성곽(城廓)이나 궁전을 비롯하여 寺刹·문묘(文廟)·객사(客舍)·주택 등 많은 분야에 걸쳐 다양하지만, 특히 사찰건물이 질적으로나 수적으로 가장 두드러진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건축사를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 중에서도 사찰건물의 수가 가장 많다.
여기서 우리 나라 목조건축의 양식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백제·신라에 비하여 가장 빨리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구를 갖추었고,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가장 빠른 시기에 행해졌다. 불교 역시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되었고, 문화도 삼국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의 건축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의 일부 구조, 또는 벽화 고분에 그려진 건물도 및 건물 부분을 그린 그림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고구려시대의 목조 건물은 이미 완전한 보(樑)와 도리로 가구(架構)되었고,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었다. 기둥 위에는 공포( 包)를 짜 올렸는데, 그 중에는 이중으로 짜인 것도 적지 않다. 또 공포에는 기둥머리(柱頭)나 소로(小累)에 굽받침이 있는 것과 굽받침이 없는 것이 있어, 그 양식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공포 부분을 약화(略化)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역계단형(逆階段形)으로 2단이나 3단으로 된 것도 있다.

대부분의 기둥은 그 공포가 그 위의 긴 가로목(橫材)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는 팔자형(八字形)으로 된 솟을대공(臺工)을 두고, 그 위의 도리를 받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솟을대공 사이에 간단한 동자주(童子柱)를 세운 것도 있고, 또 창방(昌枋)과 도리 사이에 공포를 배치한 것도 볼 수 있다.
지붕 형태에 있어서는 규모가 큰 건물은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고, 규모가 작은 건물에는 맞배지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목조건축은 세부양식이나 구조를 비교적 자세히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러한 건축양식이 후세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또 발전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백제의 목조건축 양식에 대해서는 지금 남아 있는 유구(遺構)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분이나 기타 석조유물에도 이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일본 나량(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 건물이 백제에서 건너간 공장(工匠)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전해 오는데, 그 중 몇몇 건물은 비록 후세에 보수를 하기는 했다고 하나, 창건 당초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이 절에 소장된 작은 불감(佛龕)인 옥충주자(玉蟲廚子)가 백제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목조건물을 충실히 모형(模型)한 불감이기 때문에 백제의 목초건축을 고찰하는 데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백제의 것과 동일한지, 또는 그 양식만이 백제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법륭사의 건물 양식을 보면, 기둥에는 역시 배흘림이 많으며, 기둥머리에는 굽받침이 있고, 공포 모양도 고구려의 것과 비슷하다. 특이한 것은 법륭사의 중문(中門)이나 5중탑(五重塔) 및 옥충주자 등의 공포의 소로, 그리고 첨차( 遮)와 소로가 모두 구름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양식이다.

신라에 있어서는 고신라나 통일신라를 통하여 유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목조 건축의 양식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아, 고신라에서는 백제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양식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고구려·백제의 양식과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세부구조에서 약간 복잡해진 것뿐인 듯하다. 이것은, 일본의 건물 유구나 중국에서 8세기초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미석(楣石)에 선각(線刻)된 불전(佛殿)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고, 실상사(實相寺) 백장암(百丈庵)의 3층석탑이나 쌍봉사(雙峰寺)의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등 신라시대의 석조물 세부(細部)를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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