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발굴로 드러날 서울의 참 모습
서울이 갖고 있는 시간의 켜와 공간의 틀은 깊고도 넓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의 켜 중 그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 켜는 조선시대부터지만 조선의 수도로 새 출발하기 이전에 서울은 고려시대의 남경으로 존재했고, 그 이전 삼국이 정립되어 있던 시절에는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다. 아직 백제시대의 수도와 고려시대 남경의 모습에 대해서는 윤곽조차 파악하기 힘들지만, 역사도시에 대한 관심과 서울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발사업 과정에서 행해지는 발굴을 통해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 흔적들이 찾아지고 있다. 아스라한 서울의 원형을 찾는 작업에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오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묻혀있는 서울의 실체가 있다면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고려시대의 남경과 백제의 수도가 시간과 지층 속에 묻혀있다면, 근대 서울은 우리의 의식 속에 묻혀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땅 속에 묻혀있는 서울에 비해 의식의 무덤에 갇혀 있는 서울을 발굴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원형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우리는 주저 없이 조선시대의 서울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이 만들어진 경위에 대해 밝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서울은 도성과 성저십리로 구성되었으며, 도성 안은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정도로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서울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매우 깊은 사람으로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변화를 겪었을까? 우리는 자연의 산세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서울이 일제에 의해 뜯기고 잘려나가 많은 부분에서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알고 있다. 일제강점 36년 동안 많은 부분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의 수도로 개국했을 당시의 큰 틀인 청계천을 품에 안고 종로와 남대문을 골격으로 하는 도시구조는 성곽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출발한 대한제국의 황도만들기의 성과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서울을 이야기하면서 서울의 뿌리는 조선시대의 서울에서 찾고, 오늘날 서울의 삶은 6·25전쟁이후 경제개발의 성과를 거둔 대한민국의 서울을 통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근대한국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기의 서울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조선 개국 당시 서울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대한제국의 출범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대한제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양문화의 발원지 정동
개항 이후 서울의 첫 변화는 1876년 조선정부와 국교를 수립한 각국 공사관들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수교국가인 일본은 1880년 공사관을 서대문 밖에 설치하였으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1883년 정동에 공사관을 마련하였다. 이를 계기로 도성 안에는 외국인의 거주가 본격화되었고,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설치했던 일본도 도성 안으로 공사관을 옮겼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과 중국 공사관은 명동과 남촌에 각기 독립적으로 공사관을 설치했으나, 유럽국가의 공사관은 모두 정동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왜일까? 서구국가의 공사관이 정동에 집중된 것은 조선과 서양국가 모두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조선의 입장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와 문화를 갖고 있는 서양인들이 도심 곳곳에 산재하는 것보다 한 곳에 몰려있는 것이 관리에 편리했을 터이고, 서양인 입장에서는 유럽인들끼리 함께 있음으로 해서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동은 서울에서 서양문화의 발원지가 되었고, 정동에 세워지는 각국 공사관은 빠르게 정동의 도시 풍경을 바꿔나갔다. 특히, 도심에 면한 영국공사관과 서대문 성벽에 근접하여 우뚝 솟은 프랑스 공사관 그리고 도성 안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러시아공사관은 각기 이국적 도시경관을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형성된 외교타운 정동은 단순히 외국공관만 존재했던 곳은 아니었다. 선교사와 자국민의 안위를 위해 공사관 주변에 그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고 이를 계기로 언드우드 주택에서 새문안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정동 한복판에 정동제일교회가 들어섰고 가톨릭 수녀원도 지어졌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러시아공사관 옆에는 러시아정교회가, 영국공사관 옆에는 성공회성당이 세워졌다. 1920년대 말에는 구세군회관도 들어섰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손탁호텔에서 그들의 모임을 즐기곤 하였다. 이처럼 서울에서 이국적인 경관을 형성해 가던 정동이 정치의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다.
도시구조 개편의 핵심 경운궁 건설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한 고종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경운궁 수리는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을 새로운 정궁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이는 단순한 궁궐 이전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조국가의 수도에서 황제국가의 수도이자 근대국가로의 도시개조사업의 첫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개국한지 5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도심 한복판에 새롭게 중건된 경운궁의 입지는 이전의 궁궐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경희궁이 북악과 응봉, 인왕산을 배경으로 각기 자리 잡았지만, 경운궁은 시가지 한가운데 들어섰기 때문이다. 때문에 궁궐은 좁았고 궁역은 들쭉날쭉했지만 도성 안에서 궁궐이 갖는 중심성은 여느 궁궐보다 강했다. 새로 건설된 경운궁과 육조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황토현을 깎고 백운동천 위에 다리를 놓았으며, 대한제국의 출범을 알리기 위해 세워진 환구단과 연결되는 소공로가 개설되면서 대한문 앞은 명실상부한 서울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1897년 고종은 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의 제안에 따라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의 정전인 석조전을 J.R. 하딩에게 의뢰하였는데, 이는 새롭게 출발한 대한제국이 서구 국가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 조치였다. 경운궁에는 석조전 이외에도 구성헌과 돈덕전 그리고 중명전 등 여러 서양식 전각들이 들어섰다.
고종의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서울 곳곳에서 펼쳐졌다. 영은문이 세워졌던 곳에 서재필 박사를 앞세워 독립문을 건설하여 대한제국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서구열강과 일본에게 독립국가의 의지를 명확히 하였으며, 도심에는 근대도시의 상징적인 장치인 탑골공원도 조성하였다. 서양에서 공원은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도시환경을 치유하기 위해 탄생하였지만 산업혁명 없이 근대사회로 진입한 서울에서 공원은 근대국가를 향한 의지를 표출하는 장치였다. 서울의 가로도 빠르게 변했다. 가가로 가득했던 거리가 정비되고, 도로 폭이 정비되었으며, 반듯해진 거리에는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좌절된 근대국가 건설의 꿈과 식민지
그러나 대한제국은 일본의 무력시위 앞에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은 후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여세를 몰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점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 근대국가 건설은 좌절되고 말았다. 1910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로 서울은 경기도의 일개 도시로 전락하였고, 일제의 식민정책은 1913년의 시구개정사업과, 1914년의 시역확장(36.18㎢)에 그대로 투영되었으며, 1913년에는 황도의 상징이었던 환구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는 조선호텔(1914)이 건축되었다. 식민지 도시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 변에는 역사주의 건축양식의 관청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 관공서는 식민지 경성에서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이전의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종교건축물이나 양관들이 연출하는 이국적 풍경과는 달랐다. 식민화되었다는 참담함 속에 접하는 건물의 위용은 한인들에게 조선을 삼킨 일본제국주의의 힘을 체험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완성된 식민지배기구는 조선 건국 이래 서울의 상징적 남북축을 형성하였던 북악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경관축을 구조적으로 개편하였다.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축은 조선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치되었고, 이어서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축됨으로써 경복궁이 위치한 북악에서 남산의 국사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상징축은 조선총독부에서 남산의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상징축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장과 서울
식민지화와 함께 이 땅에 시장경제시스템이 들어왔고,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1906년 미츠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필두로 1921년에는 조시아백화점(현 롯데백화점), 1922년 미나카이백화점, 1926년 평전백화점 등이 설립되어 1930년대의 본정통과 남대문통 주변은 일인들이 완전하게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소공로와 태평로는 대표적인 비즈니스 타운으로 변모되었다. 이렇게 변화는 한인 상권에도 영향을 미쳐, 종로에는 김윤백화점, 계림상회, 여성전용백화점인 동아부인상회 등 근대적 유통망에 의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937년에는 화신백화점이 지어져 한인 상권의 정점에 자리 잡았다. 한편, 급속한 자본주의 도시로의 성장은 퇴락한 소비도시의 면모도 갖추었다. 특히 극장과 카페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시설은 근대문학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북촌에는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동양극장 등이 있었는데, 이중 동양극장은 신파극의 중심이었다. 이밖에 일인의 영화관으로 황금좌, 약초좌, 명치좌, 희악관, 대정관 등이 있었다.
동시에 식민지 자본주의 도시의 암울한 모습도 나타났다. 토막촌이라 불리는 슬럼이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정, 신당리와 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었다. 1940년 말에는 토막민 숫자가 비공식적으로 36,000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토막민촌은 오늘날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전시체제와 도시
서울의 물리적 성장은 일제의 대륙침략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중일전쟁을 도발하기 직전인 1937년 4월 방공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전략병기로 등장한 비행기의 공습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중일전쟁에 이어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으나 무리한 확전으로 패배가 가시화되면서 서울에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도시소개대망’이 발표되고 시내 곳곳에는 소개공지대, 소개공지, 방공공지 등이 조성되어 역사도시는 전쟁의 위협만큼이나 빠르게 파괴되었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종결되었고,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설정되었던 38선이 남과 북을 가르고 급기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서울은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전쟁의 막대한 피해는 역설적으로 식민지배의 잔재를 물리적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수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된 시가지의 전재복구와 관련하여 보다 과감하고 구조적인 도시계획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식민도시 구조의 탈피는 다음 세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글·사진 |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