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숨 쉬는 그릇 옹기, 미래를 담다

chamsesang21 2010. 11. 27. 20:56

월간문화재사랑
숨 쉬는 그릇 옹기, 미래를 담다
2010-10-14 오후 03:10




흙이 살아 있어야 옹기가 숨을 쉰다

우리나라 산과 들은 경작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어 옹기장이한테는 더 할 나위 없는 보물창고이다. 나지막한 산 아래 비스듬히 누워있는 밭머리 위로 뻘건 속살을 내놓은 자그마한 산언덕이 자리하고 있는데, 옹기를 만드는 노인은 “바로 저거야.”하고 삽자루로 가리킨다. 맨 위 뗏장을 한 삽 거두어 낸 한 뼘 정도 흙은 자양분(미생물)이 제일 많아 지렁이, 굼벵이, 실지네 등 온갖 벌레들이 꿈틀거린다. 그 속에는 낙엽과 흙이 섞여 썩으면서 따스한 열 기운을 내고 있어 생물들이 생활하는데 안성맞춤인 것이다. 서로 상호 유기적인 역할로 생물들의 통로는 숨구멍을 만들고, 먹고 내 뱉은 물질은 양분이 되어 흙은 살아 숨을 쉬는 것이다. 삽으로 한 삽 뜨고 난 그 밑의 흙과 그 흙으로부터 삽 한 자루 깊이 정도 밑에 있는 흙이 옹기 만드는 흙으로는 제일 좋다고 한다. 만들 때 처지지 않고 두들겨도 힘을 받는 정도가 되어야 하며, 말릴 때 금이 가지 않고 불 속에서 터지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진 흙이어야만 한다. 점력이 묽어도 안 되고 강해서도 안 되는 자연이 농도를 점지해 준 그런 흙덩어리여야 한다. 석양 무렵에 바라보는 흙은 광채가 나고, 고기 덩어리의 붉은 살처럼 빨갛게 핏줄이 보이는 흙을 옹기장이는 ‘참질’이라고 말한다. 참질을 얻은 노인은 “흙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하며 함께 웃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지은 움막

옹기를 만드는 작업장을 움집 또는 움막이라고 한다. 옹기를 굽는 가마는 원래 야트막한 산비탈에 15도 경사면을 이루고 만들어 진다. 그러다 보니 그 경사면을 절개해서 절개 면을 벽과 기둥삼아 다른 한쪽 면으로는 창과 문을 내어 작업장을 만든다. 보통은 ‘ㄱ’자 움집인데 출입구와 창이 있는 쪽은 동쪽으로 해서 아침 햇살이 비추도록 하고 다른 한쪽은 남으로 향하게 해서 따스하고 선선한 기운을 내내 간직할 수 있게 생각해서 지었다. 자연 속에 빛과 공기를 흙집 속에 넣어 준 것이다. 불빛이 귀했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동이 틀 때 일을 시작했던 것처럼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아침 일찍 움막에 앉아 물레를 찼다. 그래서 물레 칸은 출입구에서 가깝고 동창東窓에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보통 물레 칸은 출입구 쪽으로부터 2~3개 많게는 4~5개 까지도 만들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식구들 수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창은 밀창이나 여닫이가 아닌 크지 않은 창으로(봉창) 내어서 볕을 쬐일 수 있는 높이로 만들었다. 바닥과 벽은 단단하게 다져진 진흙인데 간혹 짚을 썰어 넣기도 했으며, 이 바닥은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아니어도 단단하고 매끄럽다. 천정은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높게 만드는데 그것을 받치는 기둥은 굵거나 곧지 않아도 좋고 울퉁불퉁해도 그대로 사용해서 배흘림기둥보다도 더 멋스럽다. 그 생긴 그대로 멋쟁이 기둥에는 각종 연장을 걸어두기도 하고 부드레(큰 항아리를 만들 때 안쪽을 건조시키는 불통)같은 통과 철사 줄이 걸려 있기도 한다. 옹기 만드는 도구는 물레 칸 옆에 낮은 옴박지 안에 물을 넣고 그 속에 담가두고 쓴다. 수레, 도개, 근개, 밑가새칼 등 대부분 도구가 나무재질이므로 물속에 있지 않으면 쪼개진다. 그 외 물가죽(가죽 또는 헝겊), 들보, 무늬찍기 도구들이 놓여 있다. 물레를 돌리는 장인의 눈빛은 발과 손놀림과는 상관없이 한 곳에 머물러 예리하기만 한데 흙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던 그 마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흙으로 빚은 옹기가 흙물 옷을 입다

장인의 숨길을 멈추게 했던 옹기는 이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늘이 지고 통풍이 잘 된 건조장에서 보통 한가마 분량이 될 때까지 열흘내지 보름동안 말린다. 옹기 잿물은 흙(약토)에 나무 재와 부엽토를 물과 함께 적당한 비율로 섞어 30일 정도 침전 시킨 다음 걸러서 사용한다. 잿물 옷을 입은 옹기는 누구나 탐내는 유약이다. 시유하고 잿물이 마르기전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환친다”라고 한다. 환을 친 부분은 유약이 묻지 않아 숨구멍을 터주고 항아리가 잘 구워 졌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역할도 해주었다고 하는데 장인은 그저 장난삼아 무심히 그려 넣는 것이라 한다. 파도문양, 풀잎(난초), 꽃, 새, 나비, 글씨 등 다양한 손놀림이 있는데 무심히 눌려대는 손가락은 자연 속으로 끌려들었던 것이었다. 의도적이거나 절제된 표현이 아닌 순수함으로 항아리는 도화지가 되고 장인은 화가가 되었다.


불길 속에서 건진 생명력과 예술성

잿물 옷을 입은 옹기는 가마 속에서 재워 지는데 맨 앞쪽에는 불 막이로 보통 항아리 3~4개를 넣고 가마 뒤쪽으로는 키 작은 항아리와 작은 기물들을 채우며 혈문(항아리를 넣는 문)이 가까운 쪽은 큰항아리를 넣어 꺼내기 쉽게 재임을 한다. 재임이 끝나면 불을 때는데 이제부터가 장인에게는 인고의 시간이다. 맨 처음 때는 불이 핌불인데 이틀 정도 서서히 때면서 가마 안의 습기와 냉기를 제거 하면서 화력을 돋우는 것이다. 이때 쓰이는 나무는 3~4년 말린 참나무를 쓴다. 참나무는 단단해서 숯으로 남아 오래도록 화력을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불이 점점 세어지기 시작하면 고무래로 장작불을 깊숙이 밀어 넣는다. 점차 통소나무와 잡목을 태워가며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이 불을 돋움불 또는 대낌불(댕기는 불)이라고 한다. 보통 하루정도 때는데 이때 창솔구멍(가마 어깨 부분에 난 구멍)은 닫아둔다. 이후, 창솔구멍으로 살짝살짝 불세기를 살피면서 불 땔 준비를 한다. 점차 고무래로 장작을 밀어 넣으면서 소나무 장작을 혈구에(가마 앞부분, 불 때는 문) 가득 채워 돋음 불을 최고조로 높인다. 이때 불을 녹임불 이라 하며, 화력은 1000~1200도 까지 이르게 된다. 돋음불에서 큰불로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혈구도 막으면서 창솔구멍을 열고 창솔 불을 때기 시작한다. 가마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양옆으로 10여개가 나있는 창솔구멍에 가늘고 긴 장작으로 불을 때는 것이다. 장작을 던질 때 가마 안의 기물이 다치지 않도록 던지는 기술이 예술이다. 창불을 때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점차 뒷 굴뚝을 막는다. 창불이 끝나면 창솔구멍을 진흙으로 발라 막는다. 처음 불을 지피기 전에는 초조하고 불안해서 고사상도 차리고 기도도 하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여인들의 접근도 막았다 한다. 불을 때는 내내 불빛에서 눈길을 땔 수가 없다. 불 때기가 끝날 때쯤이면 비로소 장인은 깊은 잠을 청한다. 불길을 어르고 달래면서 자연이 주는 옷을 입고 불을 만나 옹기라는 이름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투박하고 꾸밈없는 넉넉한 그릇   

한국의 옹기는 반복되는 삶의 문화와 농축된 지혜가 다세포적인 요소들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지역적인 특성과 다양한 식문화의 발달로 우리 가옥에 장독대와 곳간을 마련하게 해 두었던 것도 옹기가 만들어낸 주거문화인 것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부엌시루와 우물가 항아리에서부터 조선시대 고문서나 화첩에는 옹기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고 그려져 있다. 발효식품을 즐겨 먹었던 우리 선조들의 무한한 옹기 사랑인 것이다. 생김새부터 둥글둥글하고 넓적하며 빛깔도 회백색, 회색, 검은색, 흑갈색 등 그다지 곱지도 않은 것이 옹기인데 마음속에 담아지는 것은 왜일까? 불 막이로 구워진 옹기나 터지고 쭈그러진 옹기는 가난한 사람이나 이웃에게 나눠가져 똥독이나 오줌항아리로 사용해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장인은 옹기에게 예술성과 생명력까지도 불어 넣어준 것이다. 자연스럽게 옹기를 만드는 점촌, 점등, 옹기마을 등이 형성되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가꾸며 더불어 살아온 옹기장이 즉, 선조들의 소박한 삶이 곧 녹색혁명을 일으키는 지혜인 것이다. 대지는 흙을 주고 산과 들에서는 땔감과 물을 얻는다. 지구상에 산소는 이들의 촉매 역할을 하며, 자연이 들려주는 메아리 소리 속 웰빙을 추구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목받는 그릇으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옹기가 깨어지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듯이, 흙과 물, 불, 공기가 만들어낸 옹기는 영원히 숨을 쉴 것이다. 자연에서 얻어 잘 쓰고 되돌려 주는 조상들의 슬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글·사진 | 이영자 옹기민속박물관장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