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華夷論의 문제의식
세계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중화를 높이고尊中華 오랑캐를 물리친다攘夷狄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화이론은 중국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동아시아의 기본적 세계관 중 하나였다. 이적 즉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의 실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첫째는 지역적 개념으로, 중화란 중국의 고대 문명이 가장 먼저 흥성하였던 화북華北 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둘째는 종족적 개념으로,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 지칭되는 변방민족과 구별되는 집단으로서 한족漢族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관념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문화적 개념으로, 중국 고대 주周나라로부터 비롯된 유교문화를 지닌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지역·종족·문화 등 세 가지 요소 중 중화와 이적을 판별하는 가장 핵심적 기준은 문화적 요소였다. 중화와 이적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거주하는 지역이나 혈연적인 종족이 아니라, 생활의 풍속·습관 특히 예악禮樂으로 집약되는 유교정치이념의 시행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문화의 담지 여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악을 갖추지 못하면 중국이 이적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예악을 갖춘다면 이적이 중화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양란兩亂의 충격과 조선중화주의
중국 한족이 세운 이른바 ‘정통왕조’인 명나라의 주도 아래 200년간 안정을 유지하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6세기 후반 일본 및 17세기 전반 만주족 등 ‘오랑캐’들의 흥성과 더불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은 명나라로 쳐들어가려는 일본과 1592년부터 7년간의 왜란을 치르고,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의 배후를 사전 제압하려는 만주족에 의해 두 차례의 호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새로운 천하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한편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인 화이론華夷論의 문제의식이 전면에 대두하게 되었다. 특히 국체의 상징인 국왕이 오랑캐로 폄하하던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던 병자호란의 결과는 지난 200년 동안 명 주도의 안정된 국제질서 속에서 화이론의 현실적 의미를 체감하지 못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의 치욕으로 막을 내린 병자호란의 패전, 그리고 1644년(인조 22) 명나라 황제가 자살하고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점령한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은 ‘화이華夷 질서가 뒤바뀐’ 상황을 새롭게 해명하는 가운데 조선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때 조선의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힘의 논리’에 순응하여 청나라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중국의 정통왕조를 대하였던 방식 그대로 청나라에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내세우며 조선왕조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이상 두 가지 방식 중,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비롯한 몇몇 지식인들은 후자의 노선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는 가운데 무력을 통한 복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자, 그들은 문화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유교적 문화국가로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였다.
중원 사람들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東夷’라고 부른다. 그 호칭이 아름답지 못하나, 중요한 것은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동쪽 오랑캐요 문왕文王은 서쪽 오랑캐이다.’라고 하였으나 그들 모두 성인·현인이 되었으니, 우리라고 공자와 맹자가 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다. 옛날 중국 복건福建 지역은 남쪽 오랑캐의 소굴이었지만 주자가 그 곳에서 태어난 뒤로 중화의 예악 문물이 번성했던 지역들이 도리어 그 곳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 오랑캐의 땅이 오늘날 중화가 되는 것은 오직 변화시키기에 달려있을 뿐이다. (「宋子大全」 권131, 「雜錄」)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이 유교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유일한 집단임을 자부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이 예의로 상징되는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천명하는 조선중화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안타깝도다! 그처럼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갑신년(1644년) 3월의 멸망을 맞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은 까닭에 잡초가 쉽게 우거지고 뱀과 지네가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는 순舜·우禹 임금이 돌아보던 땅과 공자·주자가 가르침을 전하던 지역이 모두 옛날과 달라져 오랑캐의 비린내만 가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은하수를 끌어다 깨끗이 씻어낼 수 있으리. 오직 우리나라만이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홀로 예를 간직한 나라가 되었으니, 주나라 예법이 노나라에 있다고 할 만 하다. 공자께서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뗏목을 타고 동쪽 우리나라로 올 것이다.(「宋子大全」 권138, 「皇輿考實序」)
동아시아 각국의 ‘자국중화주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자국 중심의 중화주의는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송시열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왕푸즈(王夫之: 1619-1692)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 이들은 각각 한국朝鮮·중국明淸·일본德川幕府이라는 상이한 역사적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갔지만 그들의 삶과 사상에는 중요한 공통성이 존재하였다. 17세기 초반에 태어나 명청 교체를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을 몸소 체험하였던 그들은 모두 주자학朱子學을 이론적 토대로 삼아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동요하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화이론은 조금씩 그 내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다. 송시열이 유교문화의 담지 여부에 따라 화이가 판별된다는 문화적 화이론을 변용하여 조선이 새로운 중화임을 주장한 조선중화주의를 제창한 반면, 중국 한족 출신인 왕푸즈는 화이의 지역적 경계 및 그로 말미암은 차별성을 강조한 지리적 화이론을 근거로, 만주족이 세운 청조 축출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질서 재건을 이론화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야마자키 안사이는 혈통적 화이론에 근거한 ‘일본형화이관日本型華夷觀’을 내세우며,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국神國으로서 일본의 중화적 정체성을 설명하였다.
이같은 논의들은 입론의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한결같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세계의 중심(중화)으로 인식하려 했다는 점, 즉 자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제창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17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화이론의 재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가며 ‘자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고, 이는 그동안 한족이 세운 정통왕조의 중심축 아래 일원적으로 편제되었던 천하 관념이 동요함과 동시에 다수의 중심들이 성립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 같은 현상들은 당초 한족들의 문화적 선진 성을 과시하기 위해 고안된 화이론이 근세 말기에 이르러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는 가운데, 자국 중화주의의 맥락 위에서 각국의 독자적 천하 관을 구축하는데 이론적 토대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이념은 19세기 후반 근대전환기에 이르러 서구와의 대결의식 속에서 다시금 부각되었다. 조선의 경우 송시열의 문화적 화이론에서 출발한 조선중화주의의 이념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며 반외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이항로李恒老의 벽이론闢異論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중국에서는 반만혁명反滿革命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지역적 화이론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면서, 왕푸즈는 탄쓰퉁譚嗣同·장빙린章炳麟 등 한족 주도의 근대화를 도모하던 이들에 의해 ‘민족주의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그리고 혈통적 화이론과 더불어 스이카신도垂加神道을 제창하였던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로 재해석되며 황도유학皇道儒學으로 전화되어 갔다.
글·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사진제공·연합콘텐츠,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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