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만들어진 동굴
동굴에 자리 잡은 생명체들도 느리디 느린 시간에 맞춰 게으름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느려서 아름다운 동굴과 동굴생물들도 미래 자원으로서 잠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뜻하고 얕은 바다에서 조개와 산호가 죽어 쌓인 것이 융기되어 육지로 올라와 탄산을 머금은 물에 녹아 동굴이 되고 종유석이 자라고...” 동굴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말이나 글로는 잠깐이면 된다. 그러나 동굴은 태생부터가 느렸다. 몇 억 년 전부터라고 하든 아주 오래전이라 하든 그게 그거다. 어차피 감이 안 선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종유석의 성장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수십 년 동안 미속 촬영을 해도 될까 말까다. 어떤 동굴에 가보면 종유석이 일 년에 0.02mm 자라므로 나이가 몇 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나 같은 동굴 내라도 종유석이 자라는 속도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당연히 일 년에 몇 mm 자란다는 절대적인 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긴 시간동안 느껴지지도 않는 아주 느린 성장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동굴이라도 인간의 기록 안에서 파악될 정도의 속도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이렇게 느리게 만들어진 동굴은 게을러서 변화를 싫어한다. 외부와 만나고 있는 입구에 가까울수록 제법 부지런을 떨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예 빛도 없고 온도도 습도도 변화가 없는,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환경이 된다. 이것이 동굴의 상징적인 특징인데 밖에서 계절이 바뀌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상관 안한다. 밖에 아주 많은 비가 오면 강물은 눈에 보이게 불어나다 또 눈에 보이게 수심이 낮아진다. 그러나 동굴 내부는 빨라도 하루나 반나절은 지나야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고 줄어드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처음부터 물에 의해 동굴이 만들어진 것이니 만큼 물이니까 그나마 이 정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온도의 변화를 보자. 동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깊이까지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그렇다고 밖의 변화에 그때그때 휩쓸리지 않는다. 입구와 가까워도 짧게는 7~15일, 길게는 2달 정도 지나야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깊숙이 들어가면 아예 변화가 없다. 속이 깊을수록 진득해 지는 동굴이다.
동굴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동굴생성물을 보자. 외출 전 화장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기다리는 것이 남자들에겐 참기 어려운 고통 중 하나라고 했던가. 동굴은 더 심하다. 빛이 없어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데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그랬는지 그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아주 서서히 온갖 모양과 색깔로 동굴 내부를 꾸며 왔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지켜달라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말 이곡 선생의 관동유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탐험기가 실려 있는데 성류굴을 둘러보고 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냐?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냐? 만약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때그때에 따라 쓰이는 교묘한 수단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은 극치를 이루었는가? 또 만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귀신의 공력을 가지고 천만세를 다한다 해도 어찌 이러한 극치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굴생성물을 아름다운 장식품으로만 보면 안 된다. 동굴생성물에는 과거에 발생한 기후 변화의 증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별 다른 꾸밈없이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굴도 있고 아주 단순하고 진흙만 가득한 동굴도 있다.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온 것이다. 이것이 느려 터졌어도 싫어할 수 없는 동굴의 매력이다.
느리게 오래 사는 동굴생물
동굴이 이러니 이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들도 느릿느릿 바쁠 게 없다. 이들도 지상에서 살 때는 제법 분주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동굴에 들어와 보니 그런대로 지낼 만 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환경의 변화가 없어 겨울을 날 준비가 필요 없으니 편한 면도 있었다. 문제점도 물론 있었다. 우선 빛이 없으니 보이는 게 없어 문제였는데 반면 위장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계급장 떼고 경쟁하니 똑같은 입장이라 먼저 다른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다른 감각 기관이 발달하니까 역시 지낼 만 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먹을 것이 적은 것도 문제였다. 먹을 것이라고는 빗물이 스며들 때 묻어 들어온 작은 유기물 조각들이 전부다 보니 많이 먹지도 못하고 굶는 날도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굴생물들이 살아가는 지혜로 터득한 것이 생리 대사를 느리게 하여 적게 먹고 느리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래도 할 것은 다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적게 먹고도 오래 사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동굴에 적응한 생물들은 지상에서 사는 유사 종보다 3~10배 오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입구 쪽으로 갈수록 동굴 밖의 환경이 약간씩 영향을 미치고 구아노 등 먹이도 점차 많아지는데 입구 부근에는 낙엽 등 외부에서 들어온 먹을 것이 더욱 다양해진다. 빛이 없지만 외부 환경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곳은 약간의 불안한 변화가 예상되더라도 구아노를 중심으로 그런대로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이런 분위기도 입구에 가까이 가면 아주 분주하고 서로 먹고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상태로 변한다. 먹을 것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더 먹고 더 편하게 살겠다고 싸우면서도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갈 자신이 없어 나름대로 겨울을 보내야 할 준비에 바쁘다. 이들의 일부는 과감하게 안쪽으로 들어와 근근이 지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겨울이 되면 자취를 감춘다.
게으른 동굴의 부지런한 이용
어떻든 아주 긴 세월동안 만들어진 동굴이 우리나라에는 현재 약 1,000여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지역을 나누어 해마다 조금씩 기초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중 18개의 동굴 혹은 동굴지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천연기념물은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는 최고의 평가 등급인데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평가 받는 동굴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동굴생성물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동굴 환경의 유지 상태도 양호하다. 특히, 종유석과 같이 동굴의 미적 가치를 지배하는 동굴생성물의 발달은 동굴을 평가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동굴생물들은 조사도 부족하고 크기도 작다보니 그 희소성이나 특이성에 관계없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에 살아야만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는다. 세상에 똑같은 동굴은 없다. 규모와 내용에 관계없이 나름대로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일괄적인 보호를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동굴도 다른 자연과 마찬가지로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것도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느리게 만들어진 동굴은 한번 파손되면 회복도 아주 느리고 사람이 원상 복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당연히 보호와 보존이 필요하다. 반면 동굴에 대해 지구과학적인 면과 또 느리게 사는 생명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연속성 있게 실시되어야 하고 관광과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어야 하며 경제적인 이용도 또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대상도 되어야 한다. 동굴에서 다양하게 연구하고 경험하고 오래도록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면 동굴의 게으름을 알아야 한다. 욕심도 없고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알듯 모를듯 꾸준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진득함을 알아야 한다.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거기에 있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인데 동굴은 더욱 그러하다.
글·사진 | 최용근 문화재 전문위원, 영월동굴생태관 관장 사진제공·문화재청, 한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