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환경

길, 역사가 발전하고 삶이 이동하는 공간

chamsesang21 2011. 3. 20. 13:22

길, 역사가 발전하고 삶이 이동하는 공간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3-10 조회수 166

 

도로의 기원
길이란 사람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을 돕는 교통시설물의 하나이다. 흔히 길은 도로같이 통용되었다. 사전적 정의는‘차나 우마 및 사람 등이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수있게 만들어진,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 위의 선’이라고도 하는데 고고학적 측면에서‘대상帶狀으로 연속성이 있는 특정 공간을 형성하고 그 공간에는 노면으로 인정되는 경화면硬化面과 측구側溝등의 관련시설과 통행로로 이용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길은 인류문명 발전의 기초이며 물자의 운송로, 지식과 문화 및 기술 등의 전파로, 군사 이동로로서 인간집단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재화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수단이었다.

 

길의 역사는 인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않다. 인류는 일찍이 먹을거리를 찾거나 경작하기 위하여 사냥길을 내고 농로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면서 역사발전에 따른 영역의 확대와 왕래 및 기술 등의 발달에 의하여 일정한 규모와 시설물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로를 만들게 되었다.

 

동양에서 도로의 어원은 중국의 역사 발전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주례周禮』의 주기註記에 따르면 경徑은 우마를 수용할 수 있는 오솔길이고, 진畛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소로小路이며, 도途는승거乘車한 대가, 도道는 승거 두 대, 로路는 승거 세 대를 수용할수 있는 길이라 하여 도道와 로路는 원래 길의 등급이 다름을 알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도와 로의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길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의 구분이 있을 뿐 도로와 길이 같은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편, 서양에서는‘이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Vahana와 라틴어 Vehiculum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 road는 라틴어rad(말 타고 여행하다)에서, path는 pad(발로 다져진 길)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야생동물의 통로설과 원시인의 이동로설이 있다. 야생동물 통로설은 들소와 같은 야생동물은 본능적으로 정기적 이동을 하게 되는데 북아메리카의 플레인즈 인디언(Plains Indian)같은 부족들이 들소떼를 사냥하여고기와 가죽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이 들소들의 계절적왕래에 따라 인디언들의 이동으로 이른바 인디언 통로(IndianTrails)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통로들이 서부개척민의 이동로가 되어 후일 미국의 대륙횡단철도의 모체가 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원시인 이동로설은 신석기인들이 소규모 집단을 구성하여 여름과 겨울에 번갈아 이동함으로써 점차 정착생활을 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에스키모인이나 목축민들이 정기적인 지역 간 이동을 통해 어로와 수렵생활을했던 것도 그 하나이다. 또한 관개시설 등 농업을 생계 경제수단으로 삼았던 고대 국가시대에서는 도로신설 등에 강제적인 노동력을 부역의 형태로 동원함으로써 차차 국가의 동맥 구실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의 발달과 맞물린 옛길의 역사
우리나라 옛길의 발달은 선사 및 부족국가시대부터였다고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구석기, 신석기 및 청동기문화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및 채집경제 생활을 하면서 문화요소(돌, 연모, 동물뼈, 인골, 집터, 생활도구 등)의 분포를 비교해 보면 문화전파적 측면에서 볼 때 지역 간의 왕래나 교류가매우 활발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부족국가 시대의 부족연맹체 간의 성읍城邑이나 제부諸部및 제가諸加의 존재, 또 부족 연맹체 간의 이합집산에 따른 전쟁 수행을 위한 행정, 군사도로가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상 고조선 시기에는 수도인 왕검성과 중국 요서지방의 대릉하를 지나고죽국孤竹國및 중국의 연나라와 제나라 등과 교류하였으며부여 시기에는 사출도四出道의 지배나 고구려, 읍루 선비족과의 일정한 교류를 위해 도로가 개척되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에서는 초기의 졸본성, 환도성 그리고 국내성, 5세기경의 평양천도 이후 평양성 등과의 행정군사적 통치를 위해도로가 형성되었으며 궁성과 외성 및 산성 간의 군사도로체계도 꽤 활발하게 발달하였다. 후기 도성에서의 방리제坊里制발달은 도성 안의 십자형, 주작대로형 도로를 조성하였으며 한편, 지방 간의 통치 목적으로 역驛을 설치하였다. 국내성과 평양성 사이에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삼국시대 도로 발달에 따른 교통, 통신체계의 확립을 뜻한다.특히 신라의 경우 소국小國의 병합과 9주 5소경제의 정착, 한강, 금강 유역으로의 진출로 도로(계립령로, 죽령로)와 교량(월정교,춘양교 등)의 건설, 5통通-5문역門驛의 존재나 경도역京都驛의운영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최근에는 고고학적 도로유구가 발굴되어 더욱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도성으로 삼아 궁궐과 관아 및 사찰건립 등으로 도로 건설이 확충되었으며 서경과 동경 등 지방 행차에 따른 지방도로가 조성되어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의 옛길은 점차 확대일로에 있었다. 그리하여 12목 설치와 10도제 시행으로 지방제도가 발달하게 되자 중앙과 지방 통치를 원활히 하고자 초기의 6과科체제에서 점차 22역도驛道체제로 확대, 개편되어 도로를 따라 전국적인 역로망이 구축되었다. 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역정驛丁이나 역리驛吏등의 역속驛屬이 배치되었으며 경제 및 재정을 위해 역전驛田등을 지급하여 역마를 확보함으로써 교통, 통신 수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역시 한양 천도 이후 신시가지 조성에 따라 궁궐과 6조曹거리, 4대문, 시전市廛등의 도성가로街路가 조성되었으며, 지방을 연결하는 외방도로는 전국적으로 6대로 또는 10대로 체계가 확립되어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도성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으로 가는 의주대로, 수유리를 지나 함경도 아오지에 이르는 경흥로, 망우리를 지나 평해에 이르는 평해로, 한강을 건너 부산진에 이르는 동래도, 동작진 건너 수원, 여산, 해남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제주로, 양화도 건너 갑곶진 등 강화에 이르는 강화로 외에 봉화로, 수원별로, 충청수영로, 통영별로 등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러한 도로를 따라 41역도-543개의역驛이 그물처럼 역로망을 조직하여 행정, 군사 외교 및 교통 통신제도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도로에는 통행인을 위해 교량과 나루 및 역 외에 원과 주막 등이 있어서 왕래인에게 숙박을 제공하였다. 또 역로를 따라 군사상요충지 산 정상에는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군사통신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는데 국가의 동맥 구실을 다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대동맥, 길
개화기에는 서양식 도로제도의 수용을 통해 근대적 도로를개보수하게 되었으며 일제 통감부, 조선총독부 시기에는 치도사업 계획에 따라 국도와 군도를 포함하여 도로 노폭의확장과 신설 및 개보수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침탈정책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로는 미군정시기를 지나 해방 후 그리고 1962년 제3공화국 시기의‘경제개발5개년사업계획’에 의거하여 오늘날과 같은 고속도로 및 철로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길은 중앙과 지방 읍치를 연결하여 그 위에 역참과 원과 주막을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수행하는데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국방 요충지인 병영, 수영과 진보와 그리고 시장과 생산물 집산지를 연결하는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 간 사절의 왕래 및 문화교류의 외교, 문화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교통,통신 수단으로써 대동맥 기능을 하였던 데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글·조병로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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