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수막새가 있는 풍경, 백제 한성(漢城) [정치영]

chamsesang21 2010. 8. 14. 19:02

문화재칼럼
2010-08-09 오후 05:08

신라 헌강왕은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도성을 내려다보며 시중 민공에게 물었다. “지금 민가에서는 모두 띠풀이 아니라 기와로 지붕을 이고, 나무가 아니라 숯으로 밥을 짓는다하니 과연 그러한가?”  “왕께서 즉위하신 후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풍족하고 변경이 잠잠하며 도시는 기쁘게 즐기니, 전하의 성덕 덕분입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장면은 『삼국사기』가 전하는 이야기다. 서기 880년 9월의 일이니, 실상 기울어가는 신라 국운에 대한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설화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역사에서 기와집이 즐비한 도성의 모습은 국가의 풍요로움과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기와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집들 대부분이 띠와 풀로 지붕을 이었고 불사(佛寺), 신묘(神廟), 왕궁, 관부(官府)에만 기와를 썼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건물 지붕에만 기와를 올린 것이다. 백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 에는 와박사라는 전문 장인이 기와의 제작을 지휘하였으며, 일본에도 파견되어 기술을 전수하였다. 공주, 부여, 익산에서 출토된 화려한 연꽃무늬 수막새에서 이들의 자취를 보게 된다. 상대적으로 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의 기와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백제가 기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웅진 천도 이후의 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1997년, 서울 풍납토성에서 엄청난 양의 백제 유물과 함께 수백 점의 기와와 벽돌이 쏟아져 나왔다. 지붕 끝의 수키와에 붙여 건물을 장식하는 수막새도 섞여 있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고학자들에게 왕궁과 같은 국가 핵심시설의 존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풍납토성은 온조가 건국한 도읍인 하남 위례성의 실체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백제 한성기의 수막새는 1925년 한강이 범람하였을 때 풍납토성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지만, 백제 유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석촌동고분군 출토품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공주와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의 수막새는 연꽃무늬가 대부분이었지만 석촌동의 수막새는 문양과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서울올림픽 주 경기장 건립을 위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몽촌토성에서도 기와와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이번에는 연화문 수막새가 나왔지만, 역시 웅진기 이후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특이한 수막새들에서 낙랑과 고구려 수막새와의 공통점을 발견해 내기도 하였지만, 수량도 적고 마땅한 비교자료도 없어 미완의 과제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풍납토성 발굴은 백제 기와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 것이다.



 

급기야 2004년에는 대형 구덩이에서 5천 점이 넘는 기와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에는 수막새도 수십 점 있었다. 흙을 씻어 낸 후 드러난 수막새 무늬는 역시 달랐다.

동그란 앞면에 ‘十’자 모양의 축선을 긋고, 그 끝은 +, ? 또는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네 부분으로 나뉜 각 면에는 ○, ㉤, ⊕ 과 같은 무늬를 배치하기도 한 것이 많다. 도대체 이러한 문양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낙랑의 운문수막새와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견해이다. 운문수막새는 한나라 때에 유행한 것으로, 남북조시대 연화문와당으로 대체될 때까지 주류를 형성하던 것이다.

둘째는 남중국의 동전관련 기물을 모방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동전무늬(전문)를 장식한 벽돌이 많이 쓰였고, 남중국 육조(오, 동진, 송, 제, 양, 진) 때에는 전문(錢文)도자기가 유행하였다. 동전무늬는 국가 군주의 권력, 부귀, 벽사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전문이 장식된 수막새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수키와에 전문이 찍힌 것은 몇 개가 알려져 있지만, 전문 수막새는 백제에만 있는 것이다. 2008년에는 풍납토성에서 짐승얼굴무늬(수면문) 수막새와 연꽃무늬(연화문) 수막새도 발견되었다. 짐승얼굴무늬는 중국 동진, 연꽃무늬는 남북조시대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만드는 방법은 다르다.

 백제가 당시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재지의 전통으로 발전시켰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기와들은 과연 어떤 건물을 짓는데 쓰였던 것일까?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는 아직까지 지붕에 기와를 올렸던 것이 확실한 건물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풍납토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경당지구에서는 신전이나 종묘로 추정되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터가 발굴된 바 있다. 주위에는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구덩이와 우물, 창고 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어, 이 곳에 국가의 제사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온 수많은 유물 중에는 기와가 적지 않다.

경당지구의 서쪽에서는 돌을 깔아 만든 도로와, 넓이가 3,300㎡(100평)는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규모가 이 쯤되면 국가의 공공건물이었음에 틀림없다. 5천 점이 넘는 기와를 토해낸 구덩이도 이 부근에 있다. 풍납토성 안에 정비된 도로와 국가의 중요시설들이 잘 구획되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왕이 거주하던 궁전과 성문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터가 확인될 날도 머지 않을 것이다. 굳이『구당서』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궁전과 종묘, 그리고 주요 관공서 같은 국가의 공공시설의 지붕이 수막새를 갖춘 기와의 사용처라는 점은 파악된 셈이다.



 

불사(佛寺)도 기와 지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는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건너온 후 이듬해 한산에 불사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몽촌토성 일대의 구릉을 주목하고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가 불사에 쓰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석촌동 4호분 근처의 집자리나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대형 집자리에서도 수막새가 출토된 것을 보면, 소규모 사당이나 일부 귀족의 가옥에도 기와가 쓰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외 대다수의 가옥은 초가(草家)였으리라….

자, 이제 월상루에서 경주를 내려다보듯, 백제 도읍 한성의 풍경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자. 그리고 수막새가 열지어 달려 있는 기와 지붕도 올려다보자.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풍요로움을 비는 백제인들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풍납토성의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또 어떤 수막새가 나올지 궁금하다.






▲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치영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