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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 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가리라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안도현의 시 「금강하구에서」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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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전북 북부 지방과 충청도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발원지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마을에서 반시간 남짓 올라간 신무산 정상 부근의 ‘뜬봉샘’. 작지만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금강의 상류는 장수와 진안, 무주, 충북 영동의 물이 모아져 시작된다. 덕유산(1,594m)·백운산(1,279m) 등 1,000m 이상의 높고 험한 산들이 많아서 이른바 진안고원이라 불리는 곳이거나, 진안고원의 한 줄기에서 이어진 곳들이다. 본류는 장수읍 수분리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갈라져 용담댐을 스치고, 진안고원과 덕유산에서 흘러오는 구리향천·정자천·남대천·봉황천 등 여러 지류들이 북쪽으로 흘러 대청댐으로 이어진 후, 다시 갑천을 받아들이고 연기를 거쳐 공주에 이른다. 여기에서 백마강으로 다시 태어난 후 익사, 임천, 한산을 지나 서천과 군산 사이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생(生)’의 끝을 바다의 시작에서 맞이한다. 장수,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청댐, 대전, 연기, 공주, 부여, 논산, 강경, 웅포, 군산. 전북 장수에서 시작돼 전북의 땅인 군산으로 흐르는 것이다. 숱한 역사의 슬픔과 문화의 기록을 담고 흐르는 금강의 401km 여정은 옛 백제의 땅을 고루 적시며 흐른다. 금강은 예로부터 뱃길로 이용되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얽힌 곳이다. 금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 백제 시대에는 수도를 끼고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수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의 군사들이 짓밟은 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금강은 줄곧 민족의 한을 머금은 비극의 강, 회한의 강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금강의 맑은 강물이 탁류로 변하는 과정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압제 속으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작품의 시작부분에 '이렇게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라고 하였으며, 금강은 줄곧 일제의 압박과 지배를 받는 민족의 표상이며, 시대적 고통이 개입된 강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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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한강(漢江)이나 영산강(榮山江)도 그렇기는 하지만 ―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제주도(濟州島)를 건너보고 뜀을 뛸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蘆嶺)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는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 그리고 북쪽 줄기는, 좀 단순해서, 차령산맥이 꼬리를 감추려고 하는 경기, 충청의 접경 진천 근처에서 청주를 바라보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려오다가 조치원을 지나면 거기서 비로소 오래 두고 서로 찾던 남쪽 줄기와 마주 만난다.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 한데 합수진 한 줄기 물은 게서부터 고개를 서남으로 돌려 공주를 끼고 계룡산을 바라보면서 우줄거리고 부여로…… 부여를 한 바퀴 휘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메(논산), 강경이까지 들이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潮水)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하기야 가끔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 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 시작부분 |
| ❍ 진안 죽도와 정여립
금강의 슬픈 역사. 조금 더 먼 과거로 돌아가면 정여립과 진안 죽도가 떠오른다. 진안읍 가막리 죽도. 이곳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대량천과 장수천이 합류하면서 오래전부터 섬으로 고립된 '숲속의 섬'이었다. 그러나 개발붐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논을 만들기 위해 섬 어귀에 제방을 쌓았고, 산 일부를 폭파해 장수의 물줄기를 돌려버렸다. 그 지점이 지금의 폭포가 됐다. 죽도는 전라도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동·서인의 당쟁에서 역신(逆臣)으로 몰린 정여립이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관군에게 발각돼 포위되자 자결한 곳이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그 중심은 '정여립은 역신인가? 민본 사상가인가?'이다. 그 중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한다. 서인 정철과 송익필이 사건을 조작해 당쟁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설이 제기되고, 죽음에 관해서도 죽도 자결설과 진안현감 민인백의 살해설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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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과 송익필을 포함해 서인들이 모여 있다. 대신 1: 명나라가 건재한 데 그 무슨 망발이오. 조정의 녹을 먹는 그대의 견해를 명에서 알게 될까 염려되오. 대신 2: 정해년 녹둔도에서 여진족들이 벌였던 만행을 잊으셨소. 정 철: 기억하오. 조선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백성 160여명이 납치되었지 않소. 대신 1: 충무공 이순신에게 죄를 물어 조산만호의 자리를 박탈했었지. 그때부터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쓰고 있는데, 그대는 너무 민감한 것 같소. 대신 2: 왜장, 풍신수길이 명나라를 공략하겠다고 선언한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소. 헌데 우리는 그들의 동태뿐 아니라 북쪽 여진족이 어떤 변화를 가지고 있는지도 탐지 하지 않았소이다. 대신 1: 왜는 이미 정해년에 전라도에 침범했다가 혼쭐나서 돌아가지 않았소. 게다가 지 난해부터 우리에게 두 차례 조공을 바쳤고, 통신사 파견을 간청하였소. 여튼, 우리가 상국이요. 굳이 알려고도 할 것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소. 송익필: 정작 중요한 것은 명나라나 여진족이나 왜가 아니라 전라도의 정여립입니다. 대신 1: 그 무슨 말이오. 송익필: 전라도에 염탐꾼을 보냈는데, 정여립의 낌새가 심상치 않소이다. 대신 2: (별스럽지 않다는 듯) 정여립이 반란이라도 획책한답니까? 송익필: 대동계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대신2: 대동계는 왜군을 무찌른 공덕이 있지 않소. 송익필: 지금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죽도선생이라 칭하고 군사들을 조련한다고 하오. 대신1: 군사? 송익필: 상민, 종, 중, 사당, 점쟁이, 풍수, 무당 할 것 없이 별별 계층의 인물들이 구름 처럼 모여든다고, 정 철: 일개 서생이 무슨 재력이 있어 그런다고 하오이까? 송익필: 전주와 그 인근 출신 인사가 정여립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대신 2: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김제로 낙향하던 해에도 김제군수로 가려고 인맥을 움직였지만, 소용없었지 않소. 지난번 황해도사로 가고자 했던 것도 무산되고 말았지 않소이까. 그 스스로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데, 무슨. 송익필: 사림에서는 한번이라도 정여립을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정 철: 어수선한 세상이니, 있는 자들이야 어느 자락이라도 잡으려고 할 테고, 민심을 얻고 있는 정여립이 청탁을 하면 각종 물자를 바리바리 실어 보낼 것은 자명한 일. 송익필: 정여립이 조력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대신 2: 차라리 재산이 많은 한 과부가 모든 재산을 팔아서 바쳤다면 내 믿겠소만. 대신 1: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있소. 임금은 정여립을 방자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소. 앞으로 어떤 청이 들어와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정 철: 이발 등이 잇따라 정여립을 천거하여 요직에 앉히려 하지 않습니까? 대신 1: 하하하, 무엇을 걱정하시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가 우리에게 있소. 동인을 거론하는 송익필의 말에 모두 적극적으로 바뀐다. 송익필: 큰 문제이지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정치 아닙니까. 지금 동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동인을 모두 몰아낸다면. 정 철: 그렇지. 역시 자네는 제갈량의 지혜를 가졌어. 대신 2: 그러고 보니, 정여립이 황해도로 가고자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요. 정 철: 옳거니. 황해도가 어디요. 명종 임금의 재위 시절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도적 임꺽정의 진원지가 아니오. 송익필: 세력을 황해도까지 확장해 서울을 남과 북에서 협공하려는 불측한 의도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대신 1: 협공? 그렇다면 역모를? 정 철: 지난 왜변때 그의 힘을 보지 않았소. 그가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징발하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하오. 대신 2: 그런데, 정여립을 어떻게 올가미를 씌울 수 있겠소? 송익필: 후한 말 태평도인을 자처하며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을 기억하십니까. 정 철: 왜 갑자기 그 자의 이야기를 하시는 게요. 송익필: '무자 기축년에 형통한 운수가 열릴 터이니, 태평한 세상이되기 무엇이 어려 우리.' 대신 2: 그게 무슨 말이오. 송익필: 장각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도 별별 이상한 글귀와 참설들을 항간에 유포하지 않았사옵니까. 정 철: 옳거니. 참언을 이용하자. 나라가 어지럽지만, 기축년이 되면 곧 난리가 일어 나고, 성인이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 그 성인은 바로 정여립이다. 그것 참 기발하오. 대신 2: 허나, 만일 백성들의 동요가 심해지면 이를 어쩔 것이요. 정 철: 백성이란 조금의 동요에는 크게 소리를 내지만, 그걸 누르는 힘이 더 강하다면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게 마련이지요. 대신 1: 그렇다면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전주부사 남언경이도 훗날 국문을 면치 못할 것인데. 송익필: 작은 일입니다. 그 정도의 희생 없이 무슨 대업을 하겠사옵니까. 대신 2: 언변에 능한 정여립이 동인들과 함께 역적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어찌 증명을 할 수 있겠소. 정 철: (곰곰이 생각하다 의미심장) 이미 죽은 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오.
졸작 <정으래비>(2004) 중 1막 2장 '모략'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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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의 천반산 송판서굴은 정여립과 그 부하들이 칩거했던 곳.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어 나온다. 진안군 통계연보에는 '1960년 이들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지름 6m의 솥과 화살촉이 발견됐다' 는 기록이 있다.
❍ 신정일의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금강 천리길은 역사와 문화가 깊이 스며들어 흐르는 우리 민족 삶의 현장이다. 예로부터 생활·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수로교통 및 물자유통로로 이용돼 왔으며, 지금은 발전(發電)과 공업용수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백제문화권의 중심지로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많은 문화유적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충청남·북도의 인구 중 50% 이상이 이 강 유역에 거주하며, 전북의 인구를 합칠 경우 유역 인구는 4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중류·하류 평야지역에 집중돼 있다. 문화사학자인 신정일(우리땅걷기모임 대표)은 금강을 말할 때 먼저 떠올려지는 사람이다. 그가 2007년에 금강을 답사하며 기록한 역사체험여행기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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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강의 전체를 보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천 리 길 금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만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강길을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날 하룻길을 걸은 뒤 나는 암담하기만 했다. 한 걸음도 더 떼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다리를 이끌며 과연 401㎞의 여정을 무사히 견뎌낼 수 있을까. 우려했던 대로 다음날 내 발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하면 뒤에는 기가 따르게 마련이다.’라는 옛사람들의 말처럼 발원지에서 하구로 이어지는 여정은 계속되었다.
서문 「금강 천 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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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대로 돌보지 않아 오염되고 메마르고 병들어 가는 우리 땅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 땅이 담고 있는 역사적 진실, 아름다운 문학, 그리고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은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에서부터 군산하구둑까지 401㎞의 긴 여정을 모두 다섯 구간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1구간 뜬봉샘에서 용담댐까지, 2구간 용담댐 아래에서 초강까지, 3구간 고당리에서 갑천까지, 4구간 부강포구에서 부여 현북리까지, 5구간 부여에서 군산 하구둑까지다. 불운의 혁명가 정여립 장군의 한이 서린 진안 천반산 자락을 비롯해 빼어난 경치와 그에 얽힌 전설을 간직한 양산 8경과 금강종합개발계획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신행정수도 예정지, 서해낙조 다섯 비경 중 하나인 웅포곰개나루 등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의 굴곡만큼이나 한 많은 백제의 이야기를 비롯해 금강 줄기 곳곳에 배어있는 역사와 문화, 환경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자연하구’로 일컬어지던 금강을 발품 팔아 여행하면서 찍은 250여 장의 생생한 사진들은 시각적 즐거움까지 더해주고 있어, 가족들의 테마여행이나 청소년의 체험학습에 활용하는 것에도 제격이다.
'길의 시인' 문화사학자 신정일과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 웅포와 금강하구
익산 웅포 곰개나루. 금강 건너편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남도 부여와 서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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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칙칙한 금강 하구 그 귀퉁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저녁해에 얼굴을 맞대니
박미숙 「금강하구-웅포에서」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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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둑을 따라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이 코스는 북군산 방향으로 연결돼 있다. 이 강변도로에는 아담한 정자 덕양정이 있다. 마을사람들과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익산문화원이 한해 두 차례씩 용왕제를 여는 곳이다. 덕양정 한편에는 진포대첩에 관한 역사가 쓰여 있다. 웅포는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가 700여 척의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와 최무선이 최초로 화포의 위력을 보여 준 이른바 진포대첩지이다. 최대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금강하구는 고려의 12개 조창 중 하나인 진성창이 있고, 덕성창과 득성창 또한 근거리에 있어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했던 곳. 특히 고려 말에 들어서는 왜구들이 끊임없이 서해안과 금강유역에 침입해 군산과 서천은 물론 충남 부여와 공주까지 들어가 약탈과 노략질을 자행하는 등 왜구들의 폐해가 극심했다. 진포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사살된 적의 피로 강물이 며칠간이나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진포대첩에서의 승전보는 오랜 세월 왜구침략에 피해를 보았던 금강유역 주민들에게 고려인의 긍지를 심어주었으며,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산의 토박이 시인 이병훈은 시집 『금강사계』에서 진포대첩의 시작과 끝을 서사형식으로 옮겨놓았다. 시인은 '진포대첩은 금강 유역민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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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 만경강 금강 연안 배터에서/ 배에 옮겨 실은 벼는/ 진성창으로 향한다/ 어려운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넘기는 때/ 왜구들이 쳐들어왔다/ 진포 왜구선 오백척/ 포구는 뭍으로 이어진다/ 수천명이다/ 열개도 넘는 화약병기/ 그(최무선)가 만든 병선 일백척을 몰고/ 금강하구로 마침내 진포로 이르른다/ 화약병기와 포탄이 터져나간다/ 왜구를 향해 터져나간다/ 왜구 병선 여기 저기서 불길이 솟고/ 부서져 공중에서 솟구친다/ 불이 멈춘 진포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다시 돌아온 평화의 마을은 겨울채비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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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서쪽으로 떨어지는 황홀한 낙조의 풍경을 음미할 수 있다. 늦가을이면 갈대 속 철새들과 오리 떼가 노니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예전에는 고깃배들이 덕양정까지 드나들었지만 금강하구둑이 생긴 뒤 배 모습은 볼 수 없다. 금강유원지는 하구둑이 있는 군산시 내흥동과 익산시 성산면 일대의 내수면 관광지다. 하구언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강변의 갈대숲, 그리고 뒤편으로는 돌산 (해발 100m)과 오성산(230m)의 높지 않은 구릉지가 펼쳐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금강하구는 담수호와 갯벌에 살거나 또는 오고가는 새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탐조 포인트다. 그러나 꼭 빼지 말아야 할 곳은 군산 금강하구둑에 있는 시인 이광웅(1940~1992)의 시비(詩碑). 안도현 시인의 시집 한 권도 챙겨가는 것이 좋다.
1982년 겨울 오송회 사건과 '너무 맑아서 불온한 시인' 이광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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