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백운(白雲)아래 시(詩), 그리움

chamsesang21 2009. 9. 9. 19:55

백운(白雲)아래 시(詩), 그리움
진안군 백운면



시인과 작가에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 곳에서의 삶은 문학의 힘을 일궈내는 동력이 돼 왔고, 문학의 생명을 잇게 한 정신이 됐기에 그들의 고향산천을 돌며 만나는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글로써 고향을 그리는 시인과 작가들…….
진안군 백운면. 이곳은 섬진강문학의 시원(始原)인 데미샘이 있고, 조선후기 문인 김삼의당과 담락당 하립 부부의 사후(死後) 세거지이지만, 지역의 문학에 윤기를 더하고 있는 문학인들로 더 빛이 난다. 목가적이며 전원적인 색채의 전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정상기의 시처럼 백운의 시인과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깃털처럼 부드러운 내일의 이야기를/ 간지럽게 풀어 놓고’, ‘산등성아래/ 목이 터져라/ 풀잎보다 연한/ 그리움의 씨’(「가을이야기」 부분)를 뿌린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피어난 백운면의 문학

수필가이자 아동문학가인 송화영은 수필 「귀향의 계절」을 통해 ‘고향의 가을밤을 잊지 못한다’며 ‘해마다 가을이 오면 소년시절을 보냈던 남계리의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고백한다. ‘마당에 멍석 깔고 모깃불 피운 뒤 텃밭에서 풋고추 한 주먹 쥐어다가 듬성듬성 썰어 넣고 수제비 끓여 한 양푼씩 둘러놓고 얘기 나누던 그 저녁’과 오동잎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억새꽃이 달빛에 유달리 번득이던 가을. 뚜르르르 뚜르르르. 둘러앉은 그 사이로 어디선가 가을을 알렸을 터. ‘문간 밖 살구나무에선 꽃잎이 날리고, 울 밖 복숭아나무마저 세우(細雨)속에서 담홍빛 수줍음’을 흘리던 봄밤과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별을 헤아리면, 지붕 위에 박꽃이 하얗게 눈에 부시던’ 그 짧은 여름밤의 낭만은 또 어찌하랴. 그래서 백운의 들은 작가의 가슴 속에 늘 살아 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들녘과 오곡을 비워내고 쓸쓸한 들녘, 어느 것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빈들이 되어주는 백운의 들녘…….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들판을 가로질러 학교를 오가곤 했다. 물론 신작로를 따라 학교로 가는 길이 있었기는 했지만 들길로 가는 것보다 멀 뿐 아니라 포장도로도 아닌 자갈길이었다. 이따금 고물트럭이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놓고 달아나는 길이라서 나에게는 그다지 친근감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들길로 다니기를 좋아했던 것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밤새워 별빛들을 끌어다 빚은 듯한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후두둑후두둑 발목에 떨어지는 촉감도 상쾌했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는 풀꽃들도 좋았으며, 아스라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며, 풍요가 힘에 겨워 차라리 고개를 숙여버린 수수목……. 이런 것들이 늘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송화영의 수필 「빈 들에 서서」 중에서

 

그 그리움의 한 가운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자주색 감자꽃이 출렁이는 벌밭에서 굵은 감자의 씨알을 소망하시며 북을 돋우시다 이내 산고(産苦)가 있어 나를 낳아 주셨다던’(시 「출근길에는」 중에서) 어머니는 자주색 감자꽃이 필 때면 늘 그 속에서 얼굴을 비춰준다.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인근 간이역 대합실에서 서성’ (시 「아버지의 추억」 중에서)이며, 달이 되고 싶어 하던 아버지……. 어릴 적 고향 풍경이 아스라하다.

수필 「숨은 그림 찾기」를 통해 ‘내 소년 시절은 외로움과 고난의 긴 터널이었다’고 밝히는 신용일도 ‘나만 보면 울먹이던 골뜸할매의 젖은 눈길’과 ‘밥 한 그릇 먹이려는 아즈매들의 따뜻한 정’을 그리워한다. 꿈에도 잊지 못할 이웃사촌들. 딸 많고 가난한 집의 막둥이 외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부모마저 서둘러 세상을 등졌기에 고향 백운면 사람들의 눈길과 정이 고향이다. 작가는 보일 듯 말 듯 가려져 있는 그림을 찾아 ‘오얏물 천수답 몇 다랭이와 무너져 내리는 오두막을 뒤로 하고 떠밀리다시피’ 고향을 떠나왔다고 말한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앞만 보며 넘은 대웅재는 별빛이 흐르는 아련한 꿈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부곡과 사모곡은 더 눈물겹다.

 

억눌린 방랑 길에 뜬구름 벗을 삼아
큰 시름 맺힌 아픔 말술로 달래시다
물 되고 바람이 되어 허허 웃던 아버지.

종아리 여린 살에 아픔의 줄을 긋고
오얏물 하늘 멀리 속눈썹 적시심은
어린 것 올곧기 바라시는 울아부지 정일레라.

반 그릇 나물밥에 허리띠 조이시고
소쩍새 지샌 밤을 속울음 삼키시며
정한을 끈끈한 모정으로 꽃피우신 어머니.

어릴 적 뛰어 놀던 매봉재 성송골은
울오매 무릎 베고 젖가슴 만지던 곳
오매의 살가운 눈웃음이 풀꽃으로 피었네.

신용일의 시조 「울아부지 울오매」 전문

 

아버지와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이 시는 부모님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다.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이다. 물 되고 바람 되고 풀꽃이 된 부모님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시방(十方)의 비통함. 어린 나이에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신용일의 작품에는 구제실, 도장골 등 유달리 고향의 흔적이 많다. 간혹 보이는 고향 사투리도 구성지다.

 

고향땅 오솔길은 싸목싸목 걸어가자
이끼 낀 너럭바위 어루만져 앉아보고
시루봉 흐르는 구름 세월저편 찾아가자

갯도랑 맑은 물에 찌든 손발 씻어내고
등굽은 千年老木 경이롭게 우러르다
오얏물 자운영 꽃밭 아이되어 놀다가자

구제실 무논배미 날 반기는 왕개구리
도장골 잣나무숲 정 겨운 솔부엉이
울오매 호미끝 탯자리 꿈인들 잇으리야

서산에 지는 해를 탓을 해서 무엇하리
동산에 달이 뜨니 흐린 눈이 맑아진다
이 한밤 달님 데불고 놀아본들 어떠리

신용일의 시조 「동산에 달이 뜨니」 전문

 

‘갈거리는 내 고향 마을 이름이다’로 시작하는 신용일의 수필 「갈거리」. ‘갈’은 갈대를 말하건만, 정작 갈대는 없는 곳. 태백에서 갈라진 산줄기 하나가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덕태산을 이루는데, 갈거리는 그 산자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산마을이다. 마을 뒷산과 마을 앞 나지막한 언덕이 기러기와 갈대를 연상시키고,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나르는 모양이래서 붙여진 마을이름은 여전히 선현(先賢)들의 해학으로 다가오지만,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이기의 허탈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대숲이 언제나 푸르다. 안산에 진달래 지면 오얏물 철쭉이 곱다. 한 조상의 후손들이 5백여 년을 고집스레 살아온 터. 구석구석 효자각·열녀비가 창연하고 퇴색한 재실과 충효사가 고즈넉하다.
나는 어린 시절 이 마을에서 자랐다. 밤섶에 밤 줍고 감골에 감 따고, 화랑터 우렁이 잡고 두루봉골 가재 잡고, 구석터 보리서리 용소에 멱감기, 산으로 들로 뛰놀던 기억이 새롭다.
촌로들의 늘어진 시조가락과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평화로운 마을에서, 넘치는 인정으로 갖출 것은 갖추고 지킬 것은 지키며 긍지 높게 살았다.
정월이면 설부터 보름까지 풍물 소리 그치지 않았고, 삼월 삼짇날 화전놀이·장구소리는 골골마다 흥겨웠다.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칠석과 백중, 팔월 한가위, 일년 내내 잔칫날이다.
떡 한 접시도 이웃집 어른을 먼저 생각하고 고깃국 한 그릇도 문중 어른께 먼저 드릴 줄 아는 이웃사촌들은 행복이 뭐냐고 물을 줄도 몰랐다.
언제나 사립문 열어 놓고 기쁨도 애환도 함께 나누던 내 고향 갈거리는 내 동공에 각인된 이상향인지도 모른다.

신용일의 수필 「갈거리」 중에서

 

수필가 송영자는 백운이 고향이지만 전주에서 성장했다. 작품에 대한 관심은 중수필을 지향하려는 경향이 짙으며, 생활주변의 일상사나 교단에서의 체험을 유려한 문체로 다듬어가고 있다. 아동문학가이며 시인인 강만영 역시 마령면 평지리 송산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령은 그가 성장한 곳이며, 그의 탯자리는 백운면 반송리이다. 코스모스 핀 신작로나 들녘 꼬불꼬불 휘파람 불면서 한 발 더 걸으면 백운면이고 한 발 덜 걸으면 마령면 일 터, 붉게 물든 석양은 어디나 같은데, 그 구분이 무에 그리 필요할까.
일상과 자연에서 시감(詩感)을 피워내는 전병윤의 시는 평범한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깊은 바탕에 깃들어 있는 휴머니즘을 만날 수 있다. 삶의 진실이며, 시가 삶의 한 표현인 것이다. ‘시작이 늦다고 지는 것만도/ 빠르다고 이기는 것만도 아닌/ 윷판 같은 이승’에서 시인은 ‘윷가락을 허공에 던져 놓고 안개 속 길’을 간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나는 윷판 어디쯤에 서 있는가.(시 「윷판」 중에서) ‘이 산 저 산 진달래 피워 놓고/ 두견이 애절하듯이/ 불러도 메아리 없는 그대’를 몇 밤 부옇게 지새우며 기다리다 ‘고향 집 뒤안에/ 그 때마냥 배꽃이 한참이데요’하며 속삭인다.(시 「은하강에 배꽃을 띄우고」 중에서)

남과 북의 엇갈림과 해원의 심정을 고향에 빗대어 읊은 시 「길을 트자」 역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다.

 

올 추석엔 고향에 가자
국화향기 바람에 물들고
풀벌레 피릿소리 자욱한
고향에서 만나자
(중략)
뜨끈했던 가슴 더 식기 전에
칡넝쿨도 걷어 내고
키 큰 나무도 베어 내고 길을 트자
하얀 옷을 입고 하나로 어울리자
보고 싶은 사람아

전병윤의 시 「길을 트자」

 

그 길을 따라 민들레는 꽃바람 발자국을 북으로, 북녘으로 낼 터이다. 심장의 피돌기 하나까지 한데 모아 윙윙거리며, 들썩거리며 몰아갈 터이다. 우리 것이 잊혀져가는 세상을 우려하며 전통정서의 가치와 민족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기 위해 쓴 「세시풍속」 연작시는 백운에서의 어린 시절이 가득 담겨 한국의 서정을 올곧게 느낄 수 있다.

문학으로 읽고 보는 백운면의 풍경

백운면의 풍경을 읊은 대표적인 시는 정경교의 「백운골 풍경」이다. 그의 시에는 병풍처럼 둘러싼 백마산과 덕태산, 선각산, 팔공산, 성수산 자락에서 백운의 농부들과 아낙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얼굴은 백운동 물굽이처럼 온통 주름투성이지만, 한껏 정겹다. “형님! 올 농사는 어떻겠소?”하고 물어야만 할 것 같은 표정이다.

 

백마천 백운동 물굽이 휘돌아 나가고
흰 구름 떠다니는 백운면 분지 마을
논두렁 밭두렁 엎드려
땀 흘리는 고향 마을 농부들
"형님! 올 농사는 어떻겠소?"
인사하면 검게 탄 피부에
환하게 웃는 주름진 얼굴들
고향 떠난 자녀들 학비 걱정 살림 걱정에
가는 허리 휘어지지만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땅 떠날 수 없어
고향 땅에 살고 지고

백마산 덕태산 선각산 팔공산 성수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였고
산굽이 물굽이 골짜기마다 정다운 얼굴들
이 산 저 산 꽃이 피면 고사리 꺾으러 다니고
논농사 시작되면 바쁜 일손 놓을 수 없네
꽃다운 이팔청춘 이곳에 시집왔다가
이제는 할머니 된 시골 아낙들
넓은 논밭에서 구부려 일하다가
허리를 펴면 두 눈에 들어오는 푸르른 산들
흰 구름에 어린 시절 떠올라
눈물이 어리네

임실에서 백운행 버스를 타고
임실 평야를 지나
백운 고갯마루 넘어오면
아!
저 멀리 마이산 두 귀 쫑긋거리고
왼편엔 의연한 백마산
눈앞에 다가서는 덕태, 선각, 팔공산……
흰 구름 어슬렁거리는 곳
내 고향 백운골
봄여름 가을 형형색색으로 몸단장하고
겨울이면 흰눈으로 옷을 입는
마음의 고향 백운골
아침 안개 자욱할 때면
신선 같은 봉우리들 구름 위를 산책하고
저녁 어둠 내려오면
별빛 속에 잠든다

정경교의 시 「백운골 풍경」 전문

 

백운 데미샘 어귀에서 여명문학회(http://gudosesang.com)를 이끌고 있는 김용호는 백운 토박이다. ‘돌담넘에 텃밭에서/ 노랑 수건을 쓰시고 채소를 심는/ 할머님 옆에서는 누렁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할아버님은 두엄자리 옆에 세워 둔/ 늙은 경운기에 두엄을 싣고/ 방정맞은 횐점박이 염소를 매달고/ 마룽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힐긋 바라보시며 삽작문을 나서’(시 「시골 집 풍경」 중에서)는 고향에서 해마다 봄이면 너울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햇살을 만끽하고 푸른 꿈을 꾼다.

 

맨드라미 채송화 봉선화가 자란
울타리 밑에서 나는 키도 제일 크고
잎도 제일 크게 피우고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불어 가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바람과 부딪히며
고집대로 살며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과 비록 피고 질
노오란 꽃일지라도 내게 배당된 시간을
허실하지 않고 내 고운 곳에
나뉠 수 있는 똑똑 영근 알갱이를
가득 채우렵니다.

김용호의 시 「해바라기의 꿈」 전문

 

김용호의 시에 담긴 백운 사람들의 풍경이 더없이 정겹다.
전금주의 시 「그대 거기 있기에」는 멀리 있으면 더욱 아름다운 것들, 멀리 있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예찬이다. ‘자연 속의 천국 운일암과 반일암’과 ‘신의 걸작품 마이산과 그 형제들’, ‘신의 뜻에 맞춰 이루어진 죽도 폭포’, ‘생기 넘치는 동물들의 고향 용담댐’ 등 진안의 풍경을 소개하며, 가장 먼저 읊은 풍경은 섬진강의 근원지 백운 계곡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멀리 그 자리에 있기에 가슴 벅찬 그리움만 쌓여간다.
정연의의 단편소설 「산골짜기의 추억」은 백운과 지근거리인 가래봉과 삼봉산 등이 등장하며, 한재철의 시 「진안고원(鎭安高原)」은 마이산을 중심으로 한 진안고원의 웅혼한 기상을 그렸다. 백운면 덕현리와 성수면 구신리의 경계인 백마산(白馬山)이 등장한다.
구름재 박병순의 시 「운장산아 울어라 마니산아 솟아라」는 ‘용담 백운 운일암은 올해도 단풍 붉었던가!’하고 묻는다. 전영주는 시 「백마성」을 통해 ‘백운·마령·성수 사람들 옆에 서면/ 옅은 안개빛 해돋이 냄새가 나고/ 투박한 옹배기 텁텁한 맛에 절로 중독된다’고 고백한다. ‘대통령도 깡패도 사기꾼도 도적도 없고/ 더러운 욕심도 없는/ 그저 저 푸른 배춧잎 같은 풋풋한 웃음이/ 실개천을 적시는 곳’, ‘백운면 운교리 주천 부락 전주 이씨 희훈이 형님 가을 눈빛’때문이다.
신용일의 「홍살문」은 백운면 노촌리 충효사를 주요 배경으로 했다.

 

小雪이
어제였던가
충효사(忠孝祠) 뜨락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귀목나무
앙상한 가지마다
소롯이 피어난 겨울 꽃
파아란 하늘에 흩날립니다.
고엽이
나뒹구는
빛바랜 툇마루
까치 한 쌍이 울다가더니
참새 떼가 몰려와 조잘댑니다.
곡곡방방
홍살문에 걸리는
忠臣, 孝子, 그리고 烈女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을 바탕으로
내일이 있거늘
때늦은 깨달음이
한 줄기 도랑이 되어
메마른 가슴 속에 소리 없이 흐릅니다.

신용일의 시 「홍살문」 전문

 

백운면은 한국 문학사의 한 줄기인 ‘섬진강 문학’의 시원(始原)이다. 섬진강 발원지(發源地) 데미샘이 있기 때문이다. 전병윤이 마이산의 풍광과 함께 엮은「데미샘의 길」은 섬진강 발원지인 백운면 신암리에 있는 작은 옹달샘이 소재다.

 

신암리 선각산 배꼽자리 차지하고
잠자지 않은 데미샘이 있다
어머니는 산나물을 캐 올 때마다
데미샘 물 한 병씩 들고 와서
약수라 하며 내 앞에 내미셨다
후에 알았지만, 그 물은 한 방울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섬진강 발원수였다

데미샘은 만년을 하루같이
달빛을 이고 별빛을 이고
마령과 운암, 강진과 구례, 평사리와 하동 땅
마른 입 적시면서 순리를 찾아
남으로 넓고 깊은 길을 냈다

섬진강 오백리 길을 낮은 소리 높은 소리로
사람의 길도 순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나 넉넉한 가슴에 채우고도 넘치는
데미샘은 광양만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길이 통하는 바다로 길을 이어
하나가 되었다

전병윤의 시 「데미샘의 길」 전문

 


겹겹이 쌓일 백운면의 문학

 

시원하게 뻗은 아스팔트길을 이리저리 달려도
생활이 몽글몽글 부풀지 않는 날에는
그대 하늘 흘러가는 흰구름을 불러 봐
흰구름이 말처럼 두 귀 쫑긋 세우고
달려 내려와, 그대를 등짝에 훌쩍 태우고
갈기털 휘날리며 고향으로 달려갈 터이니
그대 가슴 두근두근 구름벌판을 달려가는 도중
새까맣게 잊었던 옛날을 생각할지도 몰라
누구나 흙투성이로 나뒹굴던 학교운동장과
배고파 터벅터벅 먼지 앞세우던 하굣길을,
그러하다 문득 무말랭이처럼 쪼글쪼글해진 어미와 아비를
발견하고 눈물방울을 뚝뚝 흘릴지도 몰라
그러나 그대 잠시 그 눈물 맑은 햇볕에 말려버리고
흰구름이 태워다주는 대로 진안고원 백운의
높고 높은 천상데미 품안으로 달려가 봐
그 가슴, 그윽하고 정갈한 데미샘 앞에 내려
흰구름이 푸시시 푸시시 사그라지는 소리 들으며
엄마 젖가슴 문지르듯 데미샘을 쓰다듬어 봐
그리고 깊은 마음처럼 졸졸 차오르는 샘물을
저 멀고 먼 길 떠나는 물머리에게 먹여 봐
그럼 물머리는 섬진강이 되고 섬진강은 금방
다산의 돼지새끼들처럼 구물거리는 논과 밭들의
배를 불룩하게 채우고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 수많은 섬들까지 복스럽게 살찌울 터이니
그 물 한동안 그렇게 모든 것들의 발끝까지
짭짤하게 살려내는 존재로 남아 있다가
풀풀 증발하여 하늘에 구름이 되어갈 터이니
그대도 데미샘물 한 바가지 떠 마셔 봐
이마에 잔뜩 낀 주름살 쫙 펴지고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질 거야
그것 봐, 그대도 벌써 흰구름이 되어 있잖아

문정희(필명 문정)의 시 「흰구름이 되는 법」 전문

 

 「흰구름이 되는 법」은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문정희 시인(필명 문정)의 시다. 그의 시는 화사하다. 그러나 그 화사함이 추하거나 가볍지 않고 따뜻하고 정답다. 진솔하고 꾸밈없다. 여전히 소녀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한 여성을 통해 끊임없이 꿈과 희망의 속삭임을 듣는 것 같다.

백운면의 문학은 백운 밖에 푸르고 푸르며, 그 청산 속에서 희고 희다. 첩첩한 산등성이와 겹겹한 봉우리, 흰 구름 유연(油然)하게 부슬부슬 자욱한 백운면의 문학. 적막 속에, 구름 속에 묻혔어도 실핏줄 같은 물길들은 백운면의 시와 소설들을 전라도 구비구비 흐르게 하며, 민초들의 지난한 삶과 애환을 에두르고 있다.
백운면의 문학인들은 더 늘어갈 것이다. 문정희 시인과 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백운산(産) 시인들의 시심을 통해 그려질 백운면은 또 어떤 모습일까. 백운이 그 삶의 동반자이자 문학 여정의 도반(道伴)이다. 백운첩첩(白雲疊疊).

*일부 사진은 진안군 백운면 마을조사단의 마을조사책자에서 발췌함.
*영상으로 보는 백운동 계곡(제공: 진안 백운면사무소)
http://www.jinan.go.kr/preview-movie.do?boardskin=jinan_movie_a&url=/Tour/jinan06_46.m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