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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란 무엇일까? 백과사전에 따르면 화폐貨幣란 “교환경제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반적 교환수단 내지 일반적 유통수단”을 일컫는다. 이러한 화폐가 문화재 내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 그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고대 화폐 1969년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택지개발사업을 위한 공사가 있었다. 현재와 달리 공사 전 문화재 발굴 사전조사 제도가 없던 시절이었다. 야트막한 동산을 포크레인으로 파던 중 지하에 빈공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서 금동관과 함께 나온 것이 철정鐵鋌 100장이었다. 10장씩 한조를 구성한 10조의 철정 무더기가 발견된 것이다. 철정은 넓고 길쭉한 쇳덩어리로서, 일반적으로 가운데 부분이 좁고 양쪽 끝이 넓은 형상이다. 4세기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가야지역과 경주 등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며, 5세기 이후 창원·마산·함안·의령·고석 등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 일부에서도 발견되었다. 철정은 무기와 농기구 등 일상생활에 쓰던 철기들과 다른 특징이 있었다. 여러번 두드려 많은 겹이 진 상태였으며 미세한 조직과 낮은 탄소함량을 가진 순도 높은 철이었다. 특별한 열처리 없이 자연냉각된 상태로서, 쉽게 말해 완성품이 아니라 어떤 다른 용구를 만들 수 있는 중간단계 가공상태였다. 옛 무덤 발굴시 철정은 10개 단위로 묶음지어 발굴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서기에는 백제왕이 철정 40장을 일본에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철정이 주로 금동관·토기 등 당시 권력자의 생활귀중품과 나란히 무덤의 주요공간에 놓인 것으로 보아 철정이 가치를 지니고 일정한 숫자 단위로 취급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즉, 철정은 당시 화폐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정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따르면 “사고 팔 때 철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전폐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의 화폐 기능을 철정이 담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탑지에서 발견된 사례 2009년 1월 철정과 유사한 형태의 물건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 석탑인 익산미륵사지 탑에서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속에서 금제소형판이 나왔다. 금판에는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고 새겨져 있었다. 덕솔은 백제시대 중하급 관리명이다. 사찰에 금을 바쳤다는 사실에서 덕솔의 재력이 상당하였고, 당시 금이 귀중품으로서 사회에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은 백제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도 가치를 보장받는 대표적인 귀중품이다. 많은 금속 중에서 왜 금이 높은 대우를 받을까.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청동 사리함 명문에는 이곳이 서기 577년 조성되었다고 쓰여있다. 청동 사리함 속에는 은제 사리병이 있었고, 그 속에는 다시 금제 사리병이 있었다. 드러난 유물을 보자. 지금부터 1400년전 만들어진 금제 사리함은 표면을 닦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전 새로 만든 것처럼 표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금은 화학적으로 안정된 금속으로서 쉽게 부식되지 않는다. 철정을 다듬어 철기를 만들 듯, 금은 다양한 형태의 물건을 만들기도 쉽다. 이러한 특성에 희소성까지 더해진 결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은 귀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현재에도 세계 각국 중앙은행은 수백~수천 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 자국 화폐의 신용도를 높이고, 유사시 보유한 금을 팔거나 사서 경제상황을 조절하기 위함이다.
조선시대 문화재에서 발견된 사례 조선시대 지방이나 하층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쌀·포 등 물품화폐가 주로 유통되었지만 국가는 일찍부터 화폐로서의 상평통보 유통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발행만으로 전국에 유통할 동전을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동전 만드는 장인에게 줄 급료가 부족하고, 동전 원료인 구리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각 기관과 전국의 주요 감영에서 동전을 만들도록 하고 부유한 개인에게도 세금을 받고 화폐 제작권을 주었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한국은행 발행권” 뿐만이 아니라 “병무청 발행권”, “광주시청 발행권”, “00그룹 발행권”이 섞여 유통된 것이다.
그 재질과 외형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경남 통영시도 이러한 주화제조소의 하나였다. 통영시 태평동 일대는 옛 부터 “주전골”로 불리웠으며, 비변사등록에는 “통영에서 영조 18~ 29년 화폐를 주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실제 2007년 그곳에서 제조공정 중의 상평통보가 발굴되었다. 가운데 구멍을 아직 뚫지 않은 것, 두 엽전이 붙어있는 것 등이 발견되어 주전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유서깊은 사찰이나 종가집 건물에서 지붕 보수공사시 금붙이와 패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사찰 건물을 지으면서 신도들이 공양한 것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가 집을 지으면서 후대의 자손이 건물을 보수할 때 보탬이 되라고 넣은 것일 수도 있다. 궁궐 건물은 보수공사시 패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적으나,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시 물 수水자를 새긴 육각 은판이 발견되었다. 화재와 사건이 많았던 궁궐 특성상 화재를 막을 것을 바라는 마음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목조문화재의 가장 큰 적은 화재이며, 변변한 소방장구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더 무서운 존재였다. 궁궐의 한켠에서 불이나면 행각과 복도로 연결된 주변 건물로 불이 번진다. 두터운 목조부재가 불을 머금어 벌건 숯이 되면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우며, 물을 뿌려봐야 겉에서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건조하고 바람이 센 경우 궁궐건물 대부분이 화재에 소실되기도 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안장된 홍릉의 침전에서도 상량문과 함께 수水자 은판이 발견되었다. 구한말 외국 열강 사이에서 어수선했던 국내정세와 추락하는 왕권을 반영하듯, 경복궁·창덕궁·덕수궁 등 궁궐에서 유독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만들었듯이 어려운 시국을 이겨내고 재앙을 예방하고자 은판을 새기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금붙이는 아니지만 요즈음 목조건물이나 석탑 공사시 적심재를 채울 때 현장인부들이 동전이나 기물을 넣는 경우가 있다. 한편 장난스럽게도 생각되나, 수백년 후 후손이 그 건물을 보수할 때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수년전 경복궁 근정전 공사시 지붕 적심재에서 도편수의 장척이 발견되었다. 이 장척은 경복궁 중건당시의 건축 척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복을 빌고 화를 막고자 문화재 공사에 사용될 목재를 벌채할 경우 반드시 나무 앞에서 고사를 지낸다. 산신에게 오래된 나무의 영혼을 거두는 것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의례이다. 고사에는 돼지와 떡과 술을 올리며, 나무 벌채시에는 “어명이요”를 세 번 반복하여 외친다. 무덤과 건물에서 발견된 화폐 또는 금붙이는 이러한 기복祈福의식에서 연유한 경우가 많다. 땅의 신에게 무덤을 파는 행위를 용서받고, 무덤 안장자의 사후 안녕을 기원하며, 건물이 화마 등에 다치지 않고 건물에 살게 될 사람들의 복을 비는 것이다. 문화재 공사 현장에서는 가끔 유물이 발견된다. 이 유물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글ㅣ하선웅 문화재청 궁능관리과 시설사무관 ▶사진ㅣ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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