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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화폐는 교환에 따른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화폐와 금융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자.
화폐주조기관 ‘주전관鑄錢官’의 등장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는 쌀 등의 곡물穀貨과 삼베와 같은 직물布貨이 주로 화폐로 사용되었다. 고려 성종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鑄貨인 철전鐵錢을 직물 화폐인 포화와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화를 사용한 것은 1097년(숙종2)때 였다. 이 때 주전관鑄錢官을 설치하여 화폐주조에 착수했으며, 1101년에 은화銀貨인 은병銀甁을 주조 유통했다. 그러나 은병은 액수가 큰 것이어서 1102년 소액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했으며, 이외에도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주화는 전국적으로 유통되지는 못했고 농촌에서는 곡화나 포화가 주로 사용되었다. 또 어느 시대에나 위폐僞幣는 있는 법. 사람들이 은에 동을 섞어 위조 은병을 주조하기도 했다.
서민들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이자를 받았던 서민금융기관, ‘장생고長生庫’ 고려 시대의 자금 융통은 보寶, 장생고長生庫, 계契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보는 어떤 사업을 위해 기본 재산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얻은 이익으로 운영하는 재단이다. 주로 불교 관련 재단이 많았으며 보물 같은 존재라고해서 보라고 불렀다. 장생고는 서민들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이자를 받는 서민금융기관 역할을 했다. 또 계는 특수 관계인들이 자금을 모으고 융통하는 방법으로 사용됐으며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 이 시대에는 절대 가난으로 저축은 별로 없었을 것이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금융자산 형태가 아닌 실물로 저장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에는 1408년(태종8) 해동통보 등의 주화 사용금지로 곡화와 포화의 물품화폐가 널리 사용됐고, 지폐紙幣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여러 차례 유통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함께 지닌 포화가 선호됨에 따라 저화는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물론 저화는 법으로 정한 법화法貨였으나 화폐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일반적인 수용성general acceptability이 없어 널리 유통되지 못했다. 저화는 물품화폐-금속화폐-지폐 순의 화폐 발전단계에서 금속화폐 단계를 뛰어 넘은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동전銅錢인 조선통보를 발행함에 따라 저화의 유통이 중지되고, 조선통보만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나 관습에 젖어있던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 다시 미화米貨나 포화가 함께 사용됐다. 물론 조선 전기까지는 동전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조선팔도에 널리 퍼진 상평통보·조선시대 1푼은 오늘날 700원, 1냥은 7만원 우리나라에서 주화가 전국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 때이다. 고려 숙종 때 처음으로 철전이 유통된 것과 1678년 조선 숙종 4년 때 동전인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된 것은 재미있는 역사다. 상평통보의 발행?유통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주장에 따른 것으로 유형원은 물물교환에는 많은 비용이 수반되므로 화폐 유통이 꼭 필요하며, 액면가치와 동전의 재료인 금속가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야 오래 유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평통보는 10푼文=1전錢, 10전錢=1냥兩, 1냥兩=1관貫의 십진법에 의해 계산됐다.
그런데 상평통보 발행 이듬해인 1679년 상평통보의 규격을 변경하여 대형전大型錢으로 주조했으며, 이는 이후 상평통보의 기본이 되었고 1800년까지 1천만 냥의 상평통보가 발행 유통되었다. 물론 사주私鑄까지 포함하면 1천만 냥이 넘었을 것이다. 상평통보는 생산 중단과 재개, 동전 원료 부족에 따른 공급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 민간의 사주에 의한 위폐 등, 그 운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동전의 원료인 구리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상평통보의 액면가치는 똑같이 유지하면서 1678년의 10그램에서 1742년 8그램, 1752년 6.8그램, 1757년 4.8 그램으로 무게를 줄여 1866년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화폐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했으며 교환의 편의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전은 구리 합금을 녹인 용탕溶湯을 주형鑄型에 부어서 만드는데 이런 주형을 여러 개 연결하고 용탕이 잘 흐르도록 하여 한꺼번에 많은 동전을 주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연결된 모습이 나뭇잎 같다고 해서 동전을 엽전葉錢이라고 불렀다. 또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은 실로 꿰어 소지하거나 운반할 때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금부터 대출까지 우리나라 금융사의 기록 객주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보와 장생고는 쇠락하고 계만 발전하였다. 그 대신 금융방법으로서 정부나 민간기관이 춘궁기에 양곡을 대여했다가 추수기에 돌려받는 환곡還穀, 사채私債, 객주客主 등이 발달했다. 객주는 위탁 업무를 하는 중개인으로서 금융전업자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금융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객주는 예금?대출 업무, 어음於音과 환換의 발행·인수 업무를 했다. 객주는 고객이 위탁한 화물을 팔고 고객이 당장 그 자금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 이를 맡아 보관하는 예금 업무를 했다. 또 화물이 팔리지 않은 고객과 소상인들에게 자금을 융통해 주는 대출업무를 했다. 왕실로부터 예금을 받은 객주도 있었는데, 이는 국고은행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금과 대출에는 이자가 적용되었으며, 당시 사채 이자율을 비롯한 이자율에는 최고 한도 제한이 있었다. 또한 객주는 오늘날과 같은 어음을 발행함으로써 거래에 따른 지급 연기 중개 업무를 했으며, 상평통보 등의 동전을 멀리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으로 환을 발행하여 멀리 떨어진 지역 간 금융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객주가 중요한 금융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돈 10냥이 일본돈 1엔인 경우 10할 1876년 개항 후에도 주로 상평통보가 통용되었다. 그밖에 대동은전大東銀錢, 당오전當五錢, 평양전平壤錢과 일본화폐, 중국의 마제은馬蹄銀, 멕시코 은화 등이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88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주조기관인 전환국典局이 설립되고 1894년 은본위제도와 1901년의 금본위제도 등을 거쳐,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 그리고 중앙은행의 설립과 함께 지폐 시대로 넘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항 후 우리나라 화폐와 일본 화폐의 교환비율인 환율로서는‘할割’을 사용했다. 당시 우리나라 돈 10냥이 일본돈 1엔인 경우에 10할이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봐서 필요 시 환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평통보 총량의 3배에 달한 당백전의 발행 화폐 관련 이야기로는 발행 남발에 따른 높은 인플레이션 사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당백전의 경우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대원군은 금속 성분은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하지만 명목가치는 100배인 당백전을 발행했다. 주조한 동전의 액면가치와 주조비용과의 차이인 주조차鑄造差 이익시뇨리지: seigniorage을 더 크게 얻기 위함이었다. 당백전은 금속가치의 16-20배에 이르렀고, 이런 당백전이 1866년 12월부터 1867년 6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무려 1600만 냥이 주조 공급됐다. 1816-1863년 48년 동안 공급된 상평통보 총량의 3배에 달한 것이었다. 실물 생산은 늘지 않고 화폐공급만 증가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 바로 인플레이션. 1866년 12월에 1석에 7-8냥 하던 쌀값이 2년 후에는 44-45냥으로 600% 올랐다. 월간 인플레이션율이 7.3-7.5%에 달한 셈이다. 이는 순조 때인 1678년부터 1866년 188년 동안 쌀값이 2배 오른 것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물가상승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여 재정지출을 충당한 미국 군정 다음으로 미군정기 인플레이션이다. 미군정기는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에 걸친 3년이다. 해방 후에도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가난했다. 세금은 기본적인 나라살림을 꾸리기에도 부족했다. 미국 군정은 당시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여 얻은 시뇨리지 수입으로 재정지출을 충당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조선은행권 발행량은 3.76배 증가했고 서울의 도매물가는 4,370%나 올랐다. 월평균 11.1%에 이르는 높은 물가상승률을 보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화폐는 물론 금융기능도 교환의 편의를 위해 자연스럽게 등장하여 진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화폐는 공급량이 적절히 통제되어야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남발하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글ㅣ김영용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사진ㅣ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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