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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더운 여름 어느 날 나는 남산골 한옥마을을 찾았다. 충무로역 3번출구를 나오면 왼쪽의 “한국의 집”을 바라보면서 좁은 골목길을 곧장 올라가면 “남산골 한옥마을”이라는 커다란 대문의 현판이 보인다. 이 대문을 넘어서면 80,000m²의 널따란 정원이 한눈에 쑥 들어오면서 멀리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이렇게 시내 큰길 가까이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새삼스레 놀랍기도 하다. 그토록 숱하게 지나다니던 퇴계로, 충무로길이건만 처음 대하는 남산골 한옥마을은 나에게 경이로 다가왔다.
이곳 남산한옥마을은 지난 1998년 “남산 제모습 찾기”일환으로 조성된 곳으로 서울 곳곳에 있던 전통가옥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고 한다. 본래 조선시대 때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유명했으며 청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청학동이라고도 불리었다. 옛날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그리고 청학동을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린 초등학생부터 각국의 외국인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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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남산골 한옥마을 위치. 그림에서 ⑧의 지역이다. ⑥은 천우각, ⑦은 청학지이다 | 나는 한옥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서울의 여기저기에 깔려있는 옛 한옥이 주위의 땅값이 올라 제자리를 유지 못하고 그나마 정부의 문화유산보호라는 정책적 배려 때문에 이곳까지 모여든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도 이렇게 옛집을 그대로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될 것 같다.
먼저 한옥마을의 대문을 들어섰다. 궁궐에서와 같이 여기도 예외없이 3칸으로 나뉘어져 있어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쪽문으로 들어가고 서쪽문으로 나오도록 안내표시가 되어 있다. 오른쪽을 보니 높다란 문이 달려있어 속으로 들어가니 각종 음료수를 파는 레스토랑에 손님 몇이서 차를 마시고 있다. 이곳은 옛날 대원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을 새로 건축하던 도편수 이승업이 1860년에 삼각동에 지었던 집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것이다. 도편수집 답게 마루밑의 환기구며 문창살이 예사롭지 않다. 영업 중인 집이라 오래 머물기가 민망하여 바로 나와 옆집 김춘영 가옥으로 옮겼다. 조선말기 훈련도감의 포수였던 김춘영이 삼청동에 건립한 집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이 집은 “ㄷ”자 형의 안채와 “ㄱ”자 형의 사랑채가 한줄로 연결된 집으로 한정된 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지은 당시의 개량도시형 주택의 배치수법이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행랑채가 보이고 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는 곧 바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한 조선시대의 내외법(內外法)에 의한 공간구성이라 한다. 모든 한옥구조가 그러하듯 여기도 여성의 공간과 남성의 공간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다. 마당 한구석에 아담한 장독대와 우물이 보이고 안채의 벽은 화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화재로부터 보호되고 있다. 얼마나 많은 화마(火魔)가 조선가옥을 덮쳐서 우리의 선조들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면 화방벽이 유난히 든든하다. 이집을 나서면서 임오군란으로 민대감의 집에 잡혀 고충을 겪던 구식군대의 장교인 집주인의 고뇌가 떠오른다.
부마도위 박영효가옥을 들어섰다. 명칭에 걸맞게 소슬대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옛날 안주인이나 바깥주인이 가마에 한 채 출입이 가능토록 대문높이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서울의 팔대가(八大家)중 하나로 전해지는 이 가옥이 당초 관훈동에 있었으나 이곳에 일부만 복원되었다.
옛날 우리선조들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었다. 가옥의 구조도 남자의 사랑채와 안주인의 안채로 구분하였다. 이집도 격식 있고 양반집답게 사랑채와 안채가 내외담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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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박영효가의 누마루 모습. 누마루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주인의 휴식공간을 쓰였다 | 사랑채에는 여느 양반집 가옥에서처럼 누마루가 있어 휴식을 취하거나 손님을 맞을 때 이용하는 곳으로 그 집의 가장(家長) 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방높이보다 높게 지어졌다. 마치 고기잡이 하는 도구처럼 생긴 죽부인이 평상(平床)옆에 놓여 있어 오늘같이 무더운 여름 한나절 죽부인을 끼고 오수를 즐기고 있는 이집 주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개를 들어 지붕을 본다. 용마루와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은 한옥의 자연스러움을 보태준다. 더욱이 처마는 기둥을 옆에서 받쳐주는 역할도 한다니 조상의 지혜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안채에 딸린 부엌을 보면 이집에 살던 식구의 수가 보인다. 여느집 안방 몇배나 됨직한 크기의 부엌에 걸린 솥을 보면 하루에 소비하였을 식량이 짐작도 되지 않는다. 부엌에서 시작되는 온돌의 구조는 한글과 금속활자와 함께 우리선조가 창조한 3가지 발명품 중의 하나이다. 한옥에서 대청마루는 그 중심을 이루고 있고 여름이면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이렇게 더위를 대비한 마루구조와 추위를 막는 온돌이 한 건축물 안에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기막힌 독창성을 어디다 견줄 수 있을까?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집 주인이었던 박영효는 1861년에 태어나 14세때(고종 19년)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된다. 이 무렵 형 박영교를 따라 개화기의 주요 사상가인 재동의 박규수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임오군란이 ?난 후에는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거기서 새로운 서양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때 박영효는 태극기를 창안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것의 기본을 이루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3일만에 끝나고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김옥균등 다른 혁명세력과는 달리 이후 80세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부마는 왕녀가 언제 죽든지 재혼을 할 수 없어 이를 불쌍히 여긴 고종이 왕실여인을 첩으로 내려 주었다한다. 박영효가옥을 둘러보면서 그가 살았던 근대화의 회오리바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사람은 갔지만 그가 남겨놓은 태극기는 오늘도 펄럭인다.
이웃해 있는 윤택영재실로 이동한다. 재실이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따라서 이곳은 일반 살림집이 아니고 윤씨일가의 재실이다. 이 집은 당초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순종의 ent째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은 그의 딸이 1906년 세자비로 책봉되고 이듬해 황후가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알려졌다. 순종이 처갓집 제사를 지내려 왔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경운궁을 헐 때 나온 부재를 가져다 지었다 한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를 포함한 전체 건물 배치가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한옥 중 가장 독특하게 “원(元)”자형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쪽 제일 높은 곳에 “一”자형에 해당하는 사당채가 자리잡고 남쪽 한단 낮은 터에는 “兀”자를 이루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배치되는데 안채와 사랑채는 서로 길게 연속되어 “兀”자의 윗부분을 이루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장대석기단 위에 네모뿔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웠다. 가구(架構)는 1고주5량형식으로 전면 평주와 고주에 퇴보를, 고주후면과 평주에 대들보를 걸었다. 한옥중의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울 때 서로 귀를 맞추어 올려 세우는 “그렝이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주춧돌과 기둥사이에는 벌레가 나무를 갈아먹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려둔다. 이 그렝이 기법은 우리 한옥이 멕시코에 지어질 때 건축당국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다 당했지만 나중 지진이 일어나 모든 집이 무너져 내릴 때 이 한옥만큼만 그대로 남아 우리건축기법의 우수성을 만방에 자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택영재실과 담을 같이하여 서쪽편으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친가가 있다. 이 친가는 순정효황후가 세자비로 책봉되는 13세까지 살던 옥인동 집으로, 집이 너무 낡아서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떠 이곳에 복원하였다. 구조면에서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가 서로 연결된 “ㅁ"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장대석기단, 네모난 주춧돌, 초익공, 운공, 사괴석과 전돌을 사용한 화방벽 등은 이집이 최상류층의 저택임을 아려주고 있다. 특히 후면과 측면 툇마루 바깥쪽으로 설치한 정자(井 字)살창이 이채롭고 안마당 가장자리에 걸쳐진 쪽마루를 두른 난간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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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순정효황후 친가 내부. “ㅁ"자형의 구조에 툇마루에 걸린 난간이 아름답다 | 순정효황후는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될 때 병풍 뒤에서 이 사실을 듣고 옥쇄를 치마 밑에 숨기고 내어 주지를 않자 황후의 숙부가 강제로 빼앗아 조약의 날인을 마쳤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스무살이나 연상인 순종에게 계비로 시집을 와 격동의 세월을 헤쳐 나가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다. 겨우 3년간의 황후를 지낸 뒤 조선왕조의 끝을 보게 되고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대조전에서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72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버려진 왕족들을 추스르고 퇴락한 궁궐에서 살아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마지막 황후 순정효, 죽는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순종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나 이복동생들인 의왕, 영왕 그리고 덕혜옹주의 가족들이 많아 황실의 맏며느로서의 역할도 쉬운 일은 아니였을 것이다.
순정효황후 친가를 마지막으로 한옥답사를 끝내고 대문을 나서니 천원지방의 형세를 한 청학지와 단청이 곱게 칠해진 천우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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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천우각과 청학지 모습. 남산골한옥마을을 찾는 이의 휴식공간이다 | 막상 아쉬운 답사를 끝내고 돌아서려니 한많은 여인의 환영이 나를 붙잡는다. 뒤돌아 보니 소복한 순정효황후가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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