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옹기의 역사성과 옹기장의 미래가치

chamsesang21 2009. 3. 24. 19:36

월간문화재사랑
2009-03-06 오전 09:10
옹기는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생활용기이다. 집집마다 적게는 십 여 개, 많게는 수십 개씩 갖추어졌었던 도자기로서 한국도자기 역사상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지역과 계층의 구분 없이 가장 널리 쓰여 왔다. 한국인의 삶의 역사 자료로서 한국도기의 전통으로서, 한국도자기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옹기의 개념
옹기는 가장 생산량이 많았던 전통도자기의 하나로 요업 공학적 분류로는 도기이다. 그러나 옹기는 한국인의 삶의 역사와 함께 하였고 한국인의 생활공간의 일부분처럼 한국전통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던 존재이어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같이 한국전통도자기로서의 역사성이나 예술성, 또는 전통가치가 크게 주목되지 못하였다. 단지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정서와 민속을 대표하는 민속자료로서만 그 전통가치가 인식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옹기는 그 성형기법, 태도, 장식문양, 쓰임새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긴 전통을 이어 온 한국인의 삶의 역사 자료라 할 수 있다. 옹기는 일반적으로 도기와 자기의 분류개념보다는 일반적으로 붉게 반짝이는 유약이 입혀진 질그릇 독을 특정하여 지칭하고 있다. 발효음식을 즐기는 우리민족이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발효용기를 저장용기로 도기陶器항아리를 사용하여 왔는데 술과 장의 발효용기로 도기가 가장 효과적인 용기이었다. 그 발효용기의 필요에 의하여 한국에서는 도기 항아리의 제작이 지속적으로 발달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도기항아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옛 문헌에서는 옹甕이 사용된다. 고려시대의 일상생활 모습을 기록한 서금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事高麗圖經」에도 물을 저장하는 물항아리의 표현을 옹甕이라고 기재하고 있으며 쌀의 저장용기로 “대옹大甕”을, 과일과 식초의 저장용기로 “도기항아리를 땅에 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주술·기록들은 큰 독 을 옹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보면. 옹은 고려시대까지 도기항아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토산품조에도 도기소와 자기소로 그 생산지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徑濟志」에서도 도기 가운데 가장 큰 것,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발효용, 저장용을 옹앵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옹甕은 도기항아리를 지칭하던 것이다. 넓은 의미의 옹기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푸레독, 유약을 입힌 옻그릇, 유약을 입히지 않았으나 고온소성으로 표면이 반짝이는 반오지가 있다. 그 종류는 모두 선사시대 이래 현대까지 지속되어온 한국토기·도기전통에 있다. 푸레독과 반오지는 삼국시대 이래 크게 발전하였던 회색결질도기의 전통이며 옻그릇은 도기에 유약을 입힌 고급도기라고 할 수 있는 시유도기의 전통이다. 따라서 옹기의 개념은 도기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것이며 대체로 도기항아리를 뜻 한다. 그리고 도기항아리를 가르키는 “옹”이 근대에 와서 큰독이 옹기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옹기甕器의 역사성
옹기의 역사는 선사시대 토기에서 부터이다. 자기와는 별도로 전통 토기의 제작기법과 기능, 특성을 계승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기로 큰 독을 만들어 온 매우 강한 전통이다. 옹기에서 볼 수 있는 성형기법, 태토, 유약, 형태, 소성방법 에서 옹기의 연원을 탐색하여 보면 선사시대 이래 태토, 성형기법은 선사시대 토기로부터, 형태와 문양은 청동기 시대, 무문도기항아리, 손잡이가 있는 자배기와 고구려시대 시루, 손잡이동이, 둥근 독 에서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옹기의 성형기법과 장식문양
옹기의 성형은 선사토기 제작기법과 같이 바닥판을 만든 후 또아리 쌓기로 타래성형을 하는 방법(권상법 捲上法)과 바닥판 위에 넓은 흙판을 붙여 올리는 채바퀴 타렴 성형 방법(윤적법 輪積法) 두 가지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이와같은 성형방법은 삼국시대 경질회색도기, 고려·조선의 회색도기, 도기에 유약을 입힌 고려시대의 녹갈유 도기, 흑갈유 도기의 입 넓은 병, 항아리 등 시유도기를 포함하는 모든 도기의 성형기법이 옹기에 계승되고 있다. 옹기의 성형 후 표면을 장식하는 주요 장식무늬도 흙띠붙임의 돌대장식은 신석기시대 토기에서 옹기까지 이어지는 전통이며 유약을 손가락으로 훑어내며 그려 넣는 무늬 가운데 파상문도 삼국시대 고구려·백제토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던 패턴이며, 손가락 마디로 눌러 찍은 무늬와 돌대를 등간격으로 눌러 찍는 돌대장식도 신석기시대 토기와 마한의 옹관 등 고대토기의 장식에 쓰인 방법과 형태이다. 이 같은 표면장식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같은 자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장식기법이다. 성형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옹기의 장식기법도 고대 토기에서 부터의 기법으로 오늘날의 옹기장은 그 전통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형태의 기원 및 유약도기의 개발
현존하는 옹기항아리의 기본 형태는 목이 없는 넓은 입에 어깨부터 배가 불러 풍만한 몸체의 바닥이 편평한 둥근 항아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항아리에서부터 유래한다.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토기 항아리의 기본 형태는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토기에서도 볼 수있다. 옹기의 형태와 같은 고구려 도기는 199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구리시의 구의동, 아차산성 고구려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구의동,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도기에는 오늘의 장독대에서도 볼 수 있는 옆으로 붙인 넓은 띠 손잡이가 단지 양쪽에 붙어 있는 물동이, 시루, 자배기와 같고 윗면이 편평한 쟁반모양의 항아리 뚜껑은 오늘날 옹기와 형태가 똑같다. 또한 A.D. 3세기의 안악 제3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시루, 항아리들이 지금의 옹기와 같은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도기에 유약을 입히는 기술은 표면이 반짝이는 고급도기의 개발을 가져와서 근대에 와서는 시유된 옹기가 더욱 많이 제작되게 되었다. 옹기에 시유된 유약은 철분 함량이 높은 붉은 흙에 잿물에 섞은 잿물유약, 즉 회유灰釉계통이다. 1,200년전 구림도기의 유약과 유색이 후대에 고려시대로 계승되면서 녹갈유·흑갈유·흑유도기로 점차 개발되어갔고 흙물과 잿물을 섞어서 만드는 잿물을 친다는 옹기의 유약으로 계승된 것이다. 조선시대 시유도기의 생산의 흔적은 「조선실록지리지」의 초계군草溪郡과 진주목晉州牧 도기소에서 황옹黃瓮을 굽는다는 기록과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외공장조工典外工匠條에 충청남도 임천에도 황옹장黃瓮匠이 한사람 있다고 하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185개소의 도기소가운데 불과 2개소의 황옹과와 104명의 옹장甕匠가운데 1명의 황옹장을 별도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도 시유도기는 고급도기로서 그 생산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말 1883~1885년 외국인 조류학자 피에르Pierre Louis Jouy의 조선도자기에 관한 기록에도 “갈색과 흑색의 유약이 안팎으로 칠해져 있고 물결무늬가 있다”라고 한 기록을 보아도 19세기 말에 조선의 옹기는 대부분 다갈색의 시유도기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역사는 1200년의 전통인 것이다.

옹기장의 미래가치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여온 옹기의 역사성과 한국전통문화를 대변하는 문화적 가치는 한민족문화의 정체성 정립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중요한 자산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전통가치가 세계인이 공감하고 필요로 하는 가치 일 때는 바로 미래가치가 될 것이다. 도자기 역사상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옹기는 사라져가는 과거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발효음식 제조용기로서의 가치와 생명의 근원인 흙을 보존하는 자연환경 보존적인 가치, 세계 속 에서 한국문화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공감대를 확대하여 가는 한류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음으로 이는 오늘과 미래에서 우리 생활 문화를 보다 건강하고 윤택하게 하는 미래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사람 키 만 한 독을 지어내고 빠른 속도로 장식무늬를 새겨 넣는 놀라운 옹기장의 솜씨는 전통도자공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간색조의 단순한 형태미는 현대가 추구하는 단순미와 상통하는 예술성이 강하여 십 수 년을 수련하여야 장인이 될 수 있는 옹기장의 작품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예술품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즉 한국의 옹기는 전통수공예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 되어지는 현대사회에서 미래 자산 일수 밖에 없음으로 지금 당장 옹기의 활용도가 낮다 하여도 옹기장의 기능과 역사는 보존 되어야만 한다. 전통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 나선화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