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옛 그림에 담겨진 이야기(2) [최경현]

chamsesang21 2009. 2. 18. 22:03

문화재칼럼
2009-02-16 오후 03:37
바위의 영원성에 대한 동경

인간이 자연과 벗하며 살아온 것은 세월의 길이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다. 특히 동양의 문인들에게 우주의 진리를 체험하거나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자연은 너무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따라서 자연을 이루는 산, 물, 나무, 바위 등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이나 동경은 시서화(詩書畵)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 가운데 드넓은 대지에 우뚝 솟은 산의 일부였던 바위는 천년 세월이 흘러도 신령한 영혼이 깃든 것 같은 다양한 자태를 변함없이 보여주며 점차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움직일 수 있는 크기의 다양한 바위들은 자연 공간에서 인위적인 정원이나 실내로 옮겨져 완상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특이한 재질과 형상을 가진 작은 돌은 수석(壽石)이라 하여 널리 수집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에서 그 일부로 그려지다 단독 화목인 괴석도(怪石圖)로 발전하였다.
바위가 지닌 영원성, 즉 찰나가 아니라 거의 변화 없이 지속된다는 무궁한 존재감은 점차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의인화되어 표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북송(北宋)의 문인 서화가로 유명한 미불(米? 1051-1107)이 안휘성 무석(無錫)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마음에 드는 바위를 보자 석형(石形)이라 하여 홀을 잡고 절을 하였다는 일화는 그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준다. 이는 미불배석(米?拜石)이라는 고사인물화의 주제로 발전하여 후대에 널리 그려지니, 바위에 대한 동경이나 애호 의식이 시대를 초월하여 문인들 사이에서 계속 되었음을 알려준다.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오진(吳鎭)이 처음으로 바위만을 그렸으며, 이후 명 말기에 이르러서 문인들의 수석에 대한 애호 열기가 보편화되면서 괴석도(怪石圖)라는 독립된 화목으로 발전하였다. 명 말기의 이와 같은 문화 동향은 수석의 다양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그 옆에 산지와 특징 등에 간략히 적어 놓은 『소원석보 素園石譜』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는 당시 유행하였던 화보(畵譜)의 발간에 편승하여 강소성(江蘇省) 운간(雲間)의 수석 수집가 임유린(林有麟)이 소장하고 있었던 수석들을 그림으로 그려 1613년 목판으로 발간된 것인데, 이후 괴석도의 교본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문에서 북송의 휘종(徽宗)이나 미불(米?)이 애장했던 각종 분석(盆石)과 여러 곳에서 모은 것들을 그려 놓았다고 하여 문인들의 수석에 대한 관심이나 수집이 일찍이 북송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북송의 거비파(巨碑派) 산수화풍을 근간으로 기괴한 스타일의 산수를 잘 그렸던 오빈(吳彬 1591-1644 활동)이 1608년에 그린 <산음도상도 山陰道上圖>는 수석을 아끼고 사랑했던 또 다른 문인의 존재를 알려준다. 발문에 의하면 미만종(米萬鍾 1570-1628)의 부탁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남동북미(南董北米)라 불릴 정도로 동기창(董其昌 1555-1636)과 쌍벽을 이루었던 서예가이면서 자신의 호를 석우(石友)라 칭할 만큼 수석을 매우 좋아했던 애호가였다. 화면을 보면 약 9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진 산수는 사계절을 배경으로 거대한 장관을 이루며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다. 특히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으로 표현된 산수의 형태와 관련하여 화가 오빈이 미만종의 수석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알고 그러한 돌의 특징적 이미지를 반영하여 그렸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따라서 <산음도상도>는 단순한 산수의 재현이 아니라 미만종이 소장했던 수석이 지닌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중첩된 것으로 명 말기에 유행했던 수석 애호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청대(淸代)에는 바위가 지녔던 자연의 영원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장수(長壽)와 같은 현실에서의 길상적 의미로 바뀌면서 더욱 일반화된 소재가 되었다. 특히 청 말기 북경에서 활동했던 주당(周棠 1806-1876)이 그린 괴석도가 유명하며, 장지만(張之萬 1811-1897)은 그의 괴석 그림을 청대 제일이라고 극찬하였다. 주당의 그림은 조선 사신들이 적극 구입하여 귀국하면서 널리 소개되었으며, 간송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현전하고 있다. 이를 보면 주당은 수분이 많은 윤필(潤筆)을 사용하여 둥글둥글한 원형감이 강조된 바위 위에 풀로 연상되는 뾰족한 필획을 가하는 특징적 화법을 구사하였는데,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나 배전(1843-1899)의 바위 표현에서 유사한 면모를 찾을 수 있어 그의 화풍이 조선 화단에 수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 화단에서는 강세황(姜世晃 1712-1791)과 최북(崔北 1712-?)에 의해 괴석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였고, 청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교유였던 신위(申緯 1769-1845)·김유근(金?根 1785-1840)·허련(許鍊 1808-1893)·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이 가운데 김유근이 그린 《황산연산도첩 黃山硯山圖帖》의 발문에서 김정희의 <연산도>를 보고 따라 그렸다고 하여 김정희도 괴석도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웠던 허련이 그린 괴석도가 몇 점 현전하고 있는데, 대개 수묵을 사용하여 바위 자체의 거칠고 단단한 괴량감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괴석을 전문으로 그렸던 대표적인 화가는 ‘정괴석’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몽인(夢人) 정학교이다. 그의 괴석도는 거의 대부분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용으로 제작된 것이며, 각이 심하게 지면서 과장된 형태나 담채를 가하여 장식성을 배가시킨 것 등에서 다른 화가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개성적인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정학교의 특징적 화풍은 당시 주요 서화수요층으로 길상성과 장식성을 중시하였던 중인들의 미감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괴석도는 문인의 전유물이었던 바위라는 전통적 소재에 근대적 미감(美感)을 반영한 것으로 전통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지닌 시대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 화단에서 정학교로 대표되는 괴석도의 유행은 장수라는 현실적 욕망과 주로 관련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역사적으로 바위가 지닌 변함없는 영원성을 동경하였던 문인들의 전통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던 상층지향적인 인간의 속성이 우의적(寓意的)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괴석도의 기원과 변천과정은 인간이 자연에서 흔히 접하였던 물상(物相)들 가운데 바위를 주목하고, 점차 아끼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변함없는 존재감에 대한 경외심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최경현 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