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온실보다 170년이나 앞선 조선초기 온실 | ||
세계 최초의 난방 온실이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조선 땅에 있었다. 이는 유럽 최초의 난방온실인 독일 하이델베르크보다 무려 170년이나 앞선다. 황토 흙벽과 온돌을 이용한 단열 지중 난방과 실내 온습도 조절, 창호지에 유지를 발라 자연 채광 및 보온, 통풍 효과를 높인 것은 실로 과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산가요록』에 실린 온실에 관한 기록 조선시대 초기의 의관醫官이었던 전순의의 종합농서인 『산가요록』에 실린 온실에 관한 기록인 동절양채冬節養菜의 내용을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실을 짓되 그 크고 작기는 임의대로 할 것이며 삼면은 토담으로 막고 온실 내의 벽은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남쪽면은 살창箭窓을 달아 역시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온실바닥은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그 구들 위에 한자반 높이로 상토床土를 쌓고 봄채소를 심어 가꿀 수 있도록 한다.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며 날씨가 매우 추울 때는 반드시 날개(飛介거적)를 두껍게 창에 덮어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온실 내에는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온화한 기운이 감돌게 하여야 흙이 희게 마르지 않는다. 또 굴뚝을 밖으로 내고 솥을 외벽 안에 걸어서 건조한 저녁에는 불을 때어 솥의 수증기가 온실 안을 훈훈하게 해야 한다. 비록 문장은 짧지만 온실 설계나 그 이용에 대해 눈에 보이듯이 요긴하게 망라하여 풀이하고 있다. 온실은 전순의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의 세종 20년(1428) 5월 27일조를 보면 세종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귤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가를 시험할 때 “수령이 가을에 집(온실)을 짓고 담을 쌓아 온돌을 만들어 보호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무렵인 15세기 중기에 강희안의 저술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도 토우(土宇움집)라 하여 온실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다만 전순의는 당시의 온실을 구체적으로 설치, 운용하는 내용을 최초로 밝힌 데 공이 크다. 그럼, 이제 이 조선초기 온실이 어째서 우수한가를 밝혀보자. 첫째로 온실바닥에 구들을 놓고 1.5척(45㎝) 높이의 거름진 상토床土를 덮은 후 구들에 불을 지핌으로서 작물(채소, 화훼)의 발아와 뿌리의 생장을 도울 수 있도록 지온을 높였다는 점이다. 흔히 작물의 발아와 생장은 눈에 보이는 지상부만 생각하기 쉬우나 뿌리의 발육이 없는 작물의 생장은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보다 약 170년 늦게 유럽에서 최초로 설치한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온실은 난로로 지상부만 가온하기 때문에 작물을 재배할 경우 필연적으로 지상에 화분을 이용하거나 지상부에 또 다른 재배시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온실 내의 보온과 보습 효과를 들 수 있다. 삼면을 흙담으로 에워싸고 흙담벽의 온실 내부는 기름종이를 발랐을 뿐 아니라 햇빛을 받는 살창에도 기름종이를 발라 서양의 유리 온실보다 보온성이 우수하다. 유리온실보다는 흙담온실이 열의 손실을 막는데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온실은 주방격인 부엌 아궁이에 솥을 걸어 불을 지펴 온실을 덮힐 때 솥안의 끓는 물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나무로 된 홈통을 통해 흙담으로 관통시켜 온실 내에 주입시킴으로써 온실 내의 지상온도를 높일 뿐 아니라 수증기의 수분으로 온실공기에 보습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서양의 온실은 공중 습기의 보전을 위해 지상에 자주 물을 뿌려 보전하는데 조선초기의 온실은 보온을 겸한 보습으로 수증기를 이용함으로써 온실 운영의 성력화省力化에 보다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채광이다. 식물이 발육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흡수하는 양분뿐 아니라 태양에서 오는 광선이 있어야 탄소동화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태양에너지가 모두 동화작용에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광선의 극히 적은 일부만이 동화작용에 이용될 뿐 대부분 지온이나 기온을 높이는 데 이용되고 있다. 조선초기의 온실은 남쪽으로 향한 살창을 통해 필요한 최소한의 광선을 이용할 뿐 아니라 온상에서 재배되는 월동작물은 대부분 장이성長日性작물로 자라면서 점점 햇빛쪼임이 길어지는 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채광 문제가 조선초기 온실의 작물재배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수한 조선초기의 온실이 어째서 16세기 이후 수많은 우리 농서에 전혀 기록돼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해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주민생활에 온돌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연료 확보가 어려워졌다는 점, 또 하나는 식품저장기술이 발전하면서 굳이 온실에서 기른 신선한 채소가 아니라도 월동 중의 채소 조달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글·사진_ 김영진 한국농업사학회 명예회장 / 농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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