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과 유적으로 보는 한국 천문학 발달사 | ||||||||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진 별과 우주에 대한 관심 한국의 천문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중국 문화의 영향은 분명 빼놓지 못할 요소다. 하지만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를 압도하기 이전, 우리 고유의 문화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우리 겨레는 청동기 시대부터 별과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의 유물인 고인돌에는 다양한 별자리들이 새겨져 있다. 별자리 고인돌은 약 10여 년 전에 북한의 평양 근처에서 처음으로 발견됐고, 그 이후 남한의 여러 곳에서도 확인됐다. 이 유물들은 원래 고고학자들이 옛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을 빌기 위해 파놓은 성혈性穴이라 부르던 것들이다. 삼국시대 독창적 천문학 발달 삼국사기에는 건국과 함께 시작되는 풍부한 천문관측 기록이 실려 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물며, 현대 천문학 연구에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삼국에 천문학자가 있었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천문을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와 기록 문화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또 나아가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천문학 지식과 관측 기술의 전통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647년에 지어진 경주첨성대(국보 제31호)는 신라의 천문학을 상징한다.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대와는 모양과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천문대라는 통설과 불교의 이상향을 모방해 만든 제단이라는 설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첨성대는 중국 천문 문화와는 다른 독창적인 면모를 가졌고 하늘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라의 천문 문화에는 도교적인 요소도 들어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곱돌을 가공하여 만든 사리함이 있는데, 부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각자의 머리 옆에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이 새겨져 있어서 도교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천문학은 신라보다 먼저 발전했다. 일찍이 관륵과 같은 백제인들이 역법과 천문학 서적을 지니고 일본에 건너갔고,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675년에 점성대占星坮라는 천문대를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에도 수준 높은 천문 문화가 있었고, 천문대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중기에 제작한 『평양전도』라는 지도와 세종실록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에도 첨성대가 있었음을 전한다. 삼국시대 천문 유물 중에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고구려 고분 벽화 속에 그려져 있는 별자리 그림들이다. 고구려 고분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중국의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했던 도교적 연제燕濟 문화와 그 서쪽의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이 나타나며,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시황 시대의 신선 사상에 닿아있다. 한편 고구려의 천문 문화는 바다를 건너 일본의 기토라고분 천문도를 낳았다. 이 천문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닮은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천문학 수준이 남아 있는 문헌과 유적으로 짐작한 것보다 상당히 높았을 가능성을 함의한다. 우리는 왜 고려 시대의 왕릉이 고구려 스타일로 조영되고 그 안에 별자리가 그려졌는지 매우 궁금해 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관련성을 명확하게 증명해 놓아야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일하던 관청은 고려 초기에 태복감과 태사국으로 불리다가 1023년에는 사천대로 바뀌었다. 1308년에 서운관이라고 고쳐 불렀고, 세종대왕 때 관상감으로 바꾸어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다. 서운관에서는 천문관측, 역법 계산, 물시계에 의한 시간 측정 등을 맡아 했으며, 나아가 길일을 잡는 일까지도 처리했다. 몽골 제국 원나라 때는 아라비아의 발달된 천문학도 받아들였다. 이를 수입한 조선은 세종대왕 때 천문학의 꽃을 활짝 피웠다. 조선 초기 왕조의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태조는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동양 천문학의 정수를 담은 천문도를 만들었고, 세종대왕 때는 중국의 베이징이나 난징이 아닌 서울을 기준점으로 일월식을 계산하기 위해 천문학을 진흥시켰다. 수학의 정비, 천문의기의 제작 및 천체 관측, 해시계·물시계·별시계의 제작, 그리고 마침내 칠정산이라는 조선을 기준점으로 한 역법이 정비됐다. 그 후 임진왜란 무렵부터 조선의 천문학은 서양의 천문학에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 온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파한 유럽 천문학이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보물 제849호)를 이광정과 권희가 조선에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1631년에 정두원이 산둥반도에서 만난 로드리게스라는 선교사에게 천리경, 해시계, 조총, 화약통과 같은 도구와 천문도, 세계지도와 같이 땅과 하늘에 관한 지식이 담긴 그림, 그리고 치력연기, 천문략, 원경설, 직방외기 등 한역서양서들을 받아온 것이 그 서막을 장식했다. 천문 시계도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현종 1669년에 송이영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기계식 추시계를 보고 그 원리를 터득해 혼천시계(국보 제230호)를 만들어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서양의 추시계가 발명된 지 겨우 십여 년 만에 머나먼 조선에서 정교한 장치를 구현해 냈다는 점이 놀랍다. 무거운 추가 내려오는 동력을 활용하여 추시계가 작동하면서 매 시간마다 시간판이 돌아가고 인형이 종을 치도록 고안됐다. 우주를 상징하는 혼천의와 지구의가 자연 법칙에 맞도록 움직였다. 천체망원경으로 해의 표면을 보다 지구의가 보여주듯이 일부 조선 천문학자들이 지구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김석문, 홍대용과 같은 학자들이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말하기도 했다.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거꾸로 매달려 우수수 아래로 떨어져 내리지나 않을까 하고 영조 임금은 의문을 품었다. 그 해답은 뉴턴의 만유인력을 이해해야 얻을 수 있었지만, 만유인력 이론은 중국에는 1859년, 일본에는 1800년 경에 이미 소개된 것에 비해, 조선에는 1867년에야 최한기에 의해 소개됐다. 조선은 근대화가 느렸던 반면에 일본은 훨씬 앞서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 들였으므로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1945년에 광복을 맞았지만 곧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50년 동안 열심히 천문학을 발전시켜 오늘날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글·사진_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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