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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대인의 생사관(生死觀) [김진순]

chamsesang21 2008. 12. 3. 23:42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대인의 생사관(生死觀) [김진순]

우리나라의 고대 삼국은 종교예술 못지않게 화려한 고분문화를 꽃피웠다.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는 가장 찬란한 고분문화를 꽃피운 나라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약 100여기 이상의 고구려 벽화고분은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은 물론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 문화상을 반영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특히 백제와 신라의 벽화고분이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수량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벽화 제작이 고구려 고분문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왜 이처럼 무덤 내부를 아름답고 다양한 벽화들로 장식하였을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영원불멸한 사후(死後)의 세계를 믿어왔다. 그들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영혼불멸(靈魂不滅) 관념은 독특한 고분문화를 형성하였다. 죽은 자의 무덤 안에는 그들이 사후에 사용할 용품들이 부장되었고, 벽과 천정에는 사후의 이상 세계를 상징하는 다양한 고분벽화들이 장식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고분벽화는 산 자를 위한 감상용의 예술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기를 원하는 이상향을 구현해낸 일종의 장의예술인 셈이다. 이러한 연유로 고분벽화는 당시인들의 사후세계관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변화, 발전한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4세기부터 조영되기 시작하여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된다. 초기의 고분벽화는 계세(繼世)적 성격이 강한 생활풍속 위주의 벽화가 유행하였다. 즉 묘주(墓主) 생전의 영화로웠던 삶이 죽은 후에도 지속되기를 염원하는 바람으로, 묘실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인 묘주가 정사(政事)를 보는 장면과 대규모의 출행도 그리고 풍요로운 실내생활도 등 현세적 장면이 주로 묘사되었다.

묘주출행도, 안악3호분, 황해도, 357년경

이처럼 현세의 영화와 권세를 강조하던 초기의 경향은 372년 불교가 정식 국교로 공인되고 불교가 고구려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5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약화되어, 불교적 사후세계관을 반영하는 다양한 벽화제재들이 무덤 내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보살상, 비천, 연화문, 공양인행렬과 같은 직접적인 불교 제재들이 등장하여, 고구려인들이 사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다름 아닌 불교의 극락정토임을 반영하고 있다.

공양인행렬도, 쌍영총, 평양, 5세기 후반
하늘연꽃, 널방 천정, 쌍영총

동시에 이 시기에는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도교적 제재들이 불교적 요소들과 함께 출현하는 선불(仙佛)혼합적 사후세계관도 보여준다. 이는 외래 종교인 불교의 전래 이후에도 고구려의 재래적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사고 깊숙이 뿌리내려 사후의 세계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해 준다. 6세기 이후 불교가 점차 쇠퇴하면서 민간 깊숙이 뿌리박힌 토속 신앙을 근간으로 한 도교는 사회 전반에 걸쳐 성행하게 되고, 결국 고분벽화의 주요 주제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성립된 사신도 벽화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벽화양식이다.

현무도, 강서대묘, 평양, 7세기 초

이제 무덤 안에는 인물 풍속적 요소나 불교적 제재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신으로 일컬어 지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무덤 널방의 사면에 자리 잡아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아울러 천정에는 신선이나 천인들이 등장하여 신선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도교가 고구려 후기 사회에 만연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벽화는 단순한 장식예술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그리고 죽은 자와 그를 보내는 산 자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의미 깊은 장의예술이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들의 염원과 그들의 시대상을 읽어 내려가는 일은 사뭇 즐거운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문화재청 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김진순 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