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문화재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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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4-15 | 조회수 | 171 |
한민족을 닮은 백색의 감수성 전 세계 어디서나 백색 옷은 하늘 앞에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드러낸다는 정서를 지닌다. 하양이란 전 세계 공통으로 하늘, 천상, 순결, 허공, 수동성, 허용, 항복의 보편적 감수성을 지닌다.
이런 옷을 입으면 나는 하늘 앞에 결백하다, 나를 데려가도 좋다, 떠나고 싶다, 당신 맘대로 하라는 감수성을 드러낸다. 조선 후기가 그랬다. 자신을 누군가에게 바치는 의미, 혹은 무언가 버려두는 의미를 조선 민중이 가졌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선 후기의 한민족은 자신을 그냥 다 드러내거나 바쳐버릴 구구절절한 시대를 살았다. 이것이 백의라는 복식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한민족이 지닌 백색의 감수성은 조선 후기의 백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무색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흰색이 무색을 대신했던 시절, 백색의 감수성은 공허함, 비워둠, 어서오세요 라는 공허의 철학을 지닌 한민족을 닮아 있다. 먼저 말해 둘 것은 한국 전통문화 혹은 민족문화란 것은 눈에 보이는 유물이나 한 시대에 유행했던 경향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유물이 어떻게 소통되었고, 경향이 만들어져 왔는가를 먼저 관찰한 이후에 그리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백색의 감수성도 그렇다.
그렇게 되면 한국, 일본, 중국같이 서로 달라 보이는 민족의 전통이 실은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적 감수성 속에 있었다는 사실, 각 민족이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문화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는 한 민족의 전통이 어떤 모습인가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 하는 공존과 평화의 문제까지 다룰 수 있게 한다. 문화재를 지나치게 민족 전통의 것으로만 재단하지 말도록 하자. 다시 말하지만, 백색의 철학 혹은 공허함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예술 속의 여백, 생활 속의 여백 한민족은 화면을 꼭꼭 채워두는 각박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폭의 여백이 그렇다. 공허함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남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그리고 싶으면 여백이 필요했다. 여백을 덮는 것이 아니라 여백과 함께 해야만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다른 민족들처럼 한민족도 공허한 공간이 사물을 존재케 한다는 것을 이처럼 알았다. 공간이 사물과 함께하고 사물도 공간과 함께 한다. 서양처럼 공간을 사물로 채워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서양의 두 천재적인 미술가만이 이 사실을 알고 느꼈다. 미켈란젤로는 공간을 만들어감으로써 조각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서양 예술가다. 그렇지 않은가? 네모난 돌을 깎아 공간을 만들어야만 조각형상이 된다.
공허가 사물을 만든다는 한민족의 공허함의 철학은 다른 종류의 문화와 문화재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의 옛 어른들은 식사를 할 때 생선을 뒤집지 않았다. 욕심내며 밥을 먹지 않고 남겨두며 먹었다. 생선의 뒷 살과 고운 반찬을 아낙네와 아이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당이라 해도 앞마당, 뒷마당, 옆 마당, 울타리 건너 마당까지 비워 두었다. 도포자락의 공간도 여유로웠다. 소매는 왜 그리 컸던가. 보자기는 또 어떤가. 아무 것이나 담을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을 보자기가 지녔다. 가방에 맞추어 물건을 골라야 하는 서양의 규격진 공간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 한민족은 이런 공허의 철학을 하얀 색상에 투영해 왔다. 조선의 백자가 그 예이다. 고려시대 청자는 실용품이었지만 백자는 예술품이었다. 백자는 조선 사대부가 실물로서는 유일하다 할 정도로 실내 예술품으로 여겼던 것이다. 서양처럼 귀족이 좋아하는 양탄자를 벽에 걸어 놓거나, 자신과 조상의 두상을 조각해 놓거나 그림을 그려 집에 걸어 놓아 공간을 채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공간을 그냥 놓아두되 아름다운 예술품을 지니고자 할 때 공허의 미를 가진 하얀색 백자를 만들었다. 물론, 백자의 백색은 보통의 백색이 아니다. 한국 고유의 백색이다. 한민족 고유의 채도를 지닌 백색의 감수성은 공간을 인정코자했던 한민족의 마음이었다. 조선백자는 내 것인 동시에 공간의 것이었다.
버선도 그렇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분모이기도 한데, 방의 공간에 개인의 존재를 주장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들어감과 동시에 당신도 들어오라는 감성이다. 이것이 백색 버선으로 표현된다. 들어가지 않은 듯이 들어와 앉는 백색의 감수성이다. 서양이 자신만의 공간을 백색 속옷에 내향적으로 표현했을 때, 한민족은 반대로 버선과 의복으로 그런 철학을 외향적으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는 한복의 동정에 와서 극에 달한다. 때가 가장 잘 타는 목을 두르는 동정임에도 불구하고 흰색만으로 고집스레 만들었던 한민족이었다. 자신을 타 공간에 허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쌀을 하얀 상태로 두고 먹는 국가는 동아시아 삼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들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먹거리가 쌀이었기에 이 또한 백색으로 그냥 놓아두었다. 먹을 때도 공허의 공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동남아시아처럼 색이 들어간 찌개를 들이부어 덮밥 형태로 먹거나 서남아시아처럼 양념과 뒤범벅을 해서 섞어 먹거나, 중앙아시아처럼 밥에 색깔을 넣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흰 밥이 사라지면 식사는 끝난다. 반찬만 먹는 것은 금지다. 하얀색 밥은 모든 음식을 배려하는 공허의 사물이다.
술도 그렇다. 동아시아 삼국의 술은 투명한 색이었다. 이는 물론 쌀과 같이 주정 재료가 그래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무색이 백색의 감수성과 같다고 했지만, 막걸리 같은 백색의 탁주는 한민족이 지닌 공허함의 철학을 더욱 강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려시대 귀족들이 청자에 담은 무색 정종을 노랑색 야채조림이나 갈색 소고기전과 함께 먹을 때, 조선 민중은 하얀색 막걸리에 하얀색 돼지고기를 붉은색 김치에 말아 먹었다.
이런 조선 민중을 보고 있노라면 고려 귀족, 조선의 사대부나 지배층보다는 오히려 민중이 외국의 산물이었던 붉은색 고추를 가장 멋지게 수용했던 역사의 주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민족의 공허함, 비움의 철학을 민중에게서 더욱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백색, 한민족의 철학 이런 공허의 공간과 개념이 없으면 한민족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개인주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개인은 언제나 남과 함께 했기 때문에 ‘나’를 비워 ‘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라는 단어가 세계 유일한 한국어법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또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비움의 철학을 한민족이 지녀온 이유다. 자신을 비우고 남을 인정해 왔던 한민족이었다.
글ㆍ신항식 전 홍익대학교 교수, 신&신 공공브랜드전략 연구소 소장 사진ㆍ문화재청, 한국콘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 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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