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일제가 남기고 간 상처, 제주 동굴진지

chamsesang21 2010. 9. 28. 17:24

월간문화재사랑
2010-08-12 오후 04:32





아름다운 제주, 그 안에 담긴 아픔의 역사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주에 가장 고통스러운 우리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2006년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등재한 도내 일본군 전쟁 유적지는 모두 13곳으로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사라봉 동굴진지, 어승생악 동굴진지,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서우봉 동굴진지, 셋알오름 동굴진지, 일출봉 해안 동굴진지,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모슬봉 일제 군사시설,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셋알오름 고사포진지,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이다.

제주시내 동쪽에 위치한 사라봉紗羅峰에는 동굴들이 많이 있다. 제주시내에 살았던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해친다는 등의 동굴 관련 괴담이 퍼져 있었다. 그것은 동굴에 대한 의구심에 가까워, 지난 2002년 근대문화유산 조사 때까지 근 30년 동안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 조사를 하면서 동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자연동굴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파헤쳐진 동굴진지라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제주섬에는 이러한 전쟁시설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본군 군사유적은 2000년대 들어 수차례의 학술조사에 의해 비로소 체계적으로 그 전모全貌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술논문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청구학술논문집 제22집(靑丘術論集 第22集2003)’에 발표한 츠카자키 마사유키塚崎昌之씨의 논문 「제주도에 있어서 일본군의 본토 결전 준비」州島における日本軍の本土決準備가 제주 4·3연구소에서 발간한 ‘4·3과 역사 제 4호(2004)’에 번역본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들 군사유물 가운데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유산이, 제주도에서도 활용방안을 모색해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자료로서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일제강점 전반기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군사적 가치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진해의 해군진수부 관할이던 제주섬에 전쟁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획책하던 1926년, 서귀포시 대정읍에 해군항공기지 건설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이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중국대륙 공격의 전초기지를 목표로 약 60만㎡(18만평)의 항공기지가 완성된다. 제주사람들은 이 항공기지를 “알뜨르비행장”이라 부른다. 제주섬의 서남부 끝자락인 이곳의 지명이 ‘알뜨르’이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8월부터 중국 난징南京폭격을 시작하는데, 96식육상공격기九六式陸上攻擊機가 나가사키長崎의 오오무라大村해군항공기지에서 출격하여 귀환하는 도중에 알뜨르비행장에서 연료를 보충하는 중간기지 역할을 한다. 같은 해 11월 일본이 상하이上海를 점령하여 오오무라항공대가 그곳으로 이전한 후에는 오오무라항공대의 지원 및 훈련시설로 사용된다. 연습용 비행기인 ‘아카톰보’의 비행연습장으로 활용되면서, 아카톰보의 격납고, 지하벙커, 탄약고, 통신시설 등을 만드는 등 1945년까지 약 265만㎡(80만평)으로 확대된다.



전쟁의 상처로 남은 일본 군사유적  

중일전쟁이 끝나고 1944년 봄까지 제주도는 전쟁의 무풍지대 같았지만, 1944년 5월경부터 일본근해에 미국잠수함이 출몰하고 B29폭격기가 개발되면서 일본본토의 공습 가능성에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제주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새삼 주목받기 시작하여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945년 1월 20일 일본군 지도부는 ‘본토결전작전대망本土決戰作戰大網’을 결정하여, 육해군의 총력을 결집시킨 결전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육군은 ‘결호작전決號作戰’을 해군은 ‘천호작전天號作戰’을 수립한다. 결호작전은 북쪽의 사할린섬부터 홋카이도지역, 동북지역, 관동지역, 동해지역, 중부지역, 큐슈지역, 그리고 한반도지역 등 7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작전을 세운 것이다. 7번째 구역인 한반도지역의 작전명을 ‘결7호작전決7號作戰’이라 하는데, 그 최전방에 제주도가 위치한 것이다. 결7호작전에 따라 제17방면군第17方面軍을 재편하고, 1945년 4월 15일 제58군사령부가 편성되고 예하에 2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및 기타 부대들이 배치된다. 제58군은 제주도를 4개 지역으로 나누고 미군의 공격루트를 예상하여 부대를 배치한다. 서남부와 서북부, 중부, 동부로 구분해, 서부지역을 ‘주진지대主陣地帶’로, 중부지역을 ‘공세준비진지攻勢準備陣地’로, 동부는 ‘유격진지遊擊陣地’로 설정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하지만 1945년 8월 해안결전을 기본으로 하는 담당지역을 사수하도록 작전변경을 명령한다. 각 시설은 주저항진지主抵抗陣地, 복곽진지複廓陣地, 전진거점前進據點, 위장진지僞裝陣地 등으로 구분하여 건설되기 시작한다.



해군의 알뜨르비행장과는 별도로, 육군에서 제주시내 서쪽에 육군서비행장(일명, 정뜨르비행장)과 육군동비행장(일명, 진드르비행장), 그리고 조천면 교래리에 비밀비행장을 건설한다. 정뜨르비행장은 현재 국제공항으로 발전했고, 교래리 비행장은 정석비행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드르비행장은 일부 일주도로에 편입되고 일부 농경지로 변형되어 옛 흔적을 찾기 어렵다. 모슬포의 알뜨르비행장은 1944년 5월 오오무라항공대 분견대(비행초보훈련이 목적)인 부산해군항공대의 비행장으로 재편되어 기지방어와 지원이 목적인 육상부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부산해군항공대는 이듬 해 2월 김해비행장으로 이전되고, 해상보위총사령부예하 제901해군항공대로 재편된다. 격납고, 지하벙커, 통신시설, 장교 및 사병용 숙소, 청사, 탄약고, 병원 등의 건축물과 주변 오름에 고사포진지 등을 설치하는 등, 일본군 군사유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해군은 해안특공기지를 만들어 결전을 준비하는데, 이 특공기지는 자살특공대이다. 모슬포 송악산, 북촌 서우봉, 성산포 일출봉, 서귀포 삼매봉, 고산 수월봉의 해안에 기지를 건설해 신요震洋 등의 특공대를 배치한다. 인간어뢰로 유명한 카이텐回天 특공대는 송악산과 서우봉에 배치 계획되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요특공대를 일출봉, 삼매봉, 수월봉에 배치하여, 일출봉(45특공대)에 진양1형震洋一型 50척과 188명의 인원이, 삼매봉(119특공대)에는 진양5형震洋五型 26척과 187명의 인원이, 수월봉(120특공대)에도 진양5형震洋五型 26척과 191명의 인원이 각각 배속된다. 진양1형 보트는 베니어판으로 만든 1인승 모터보트로서, 뱃머리 쪽에 250kg의 폭약을 장착한 1.3톤급으로 최대 16노트 항속거리 110해리이다. 길이 5.1m, 폭 1.67m, 높이 0.8m의 초소형 함정으로, 1944년 8월에 일본해군에서 정식으로 운용한다. 진양5형 함정은 2인승 모터보트로, 300kg의 폭약을 장착한 2.2톤급이며, 최대 27노트 170해리의 항속거리를 갖고 있다.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유적 중 가장 충격적인 모습의 해안동굴기지는 이 자살특공보트를 엄폐하기 위한 격납시설이었던 것이다.

 

 ‘평화의 섬’으로 다시 태어난 제주   



1945년 4월경에는 제주도에 배치된 일본군 병력은 약 40,370명이 되는데, 이전의 3,000명 규모에서 불과 1개월 사이에 엄청난 증가를 보인 것이며, 한반도 주둔 병력이 9만여 명인 점을 생각하면 한반도 총병력의 거의 반수가 제주도에 집중된 셈이다. 엄청난 병력을 수용하거나 작전개념에 따른 군사시설들을 짧은 시간 안에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수많은 도외 및 제주도민 노역자의 피해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본군 군사유적들은 일본의 본토결전을 위해 수립된 ‘결7호작전’에 따라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일찍 끝나버린 태평양전쟁의 패전에 따라 대부분의 군사유적들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그 미완성의 모습들이 오히려 더 처절하고 을씨년스러워 전쟁의 비극적 상징성을 더욱 생각하게 한다. 2005년 초, 정부에서는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함으로써, 평화의 실천과 국가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제주도가 겪었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면서, 제주의 미래를 위한 가치로서 ‘평화’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저 막연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가슴 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글·사진 | 양상호 탐라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