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장터의 의미
충주를 찾았을 때 장터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노인은 부인이 새재 넘어 경상도 문경 출신이라 하였다.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는 곳이지만, 이전부터 장길을 통하여 왕래하는 일이 빈번한 까닭에, 아는 상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태안 해변가 사람들은 부산이나 여수 사람들과는 혼인하지만, 공주 사람과 맺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물산이 이동하던 뱃길을 통한 교류 때문이다. 조선후기 장시가 발달하면서 소위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상품만이 아니라 사람의 인연도 그 경로를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시와 포구가 있었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거점이 되었던 장시는 도회지로 성장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상업도시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하천변 포구였다. 한강의 마포와 금강의 강경이 그러한 곳이었다. 이들 포구는 보통 큰 하천에서 바다 조수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밀물을 이용하여 거슬러 온 바닷배의 해산물을 내리고, 육지의 미곡을 실었다. 해산물은 다시 강배로 옮겨 실어서 상류로 운반하였다. 바닷배는 풍랑을 견디기 위하여 폭이 넓은데, 따라서 강을 거슬러 항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강배는 폭이 좁은 대신에 바다의 풍랑을 만나면 전복의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문에 바닷배와 강배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기록에는 물윗배水上船와 물 아랫배水下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여각과 객주는 흔히 이러한 포구에서 물산의 중계를 담당하였고, 때로는 외국과의 교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간 규모의 장시도 있었다. 지역 내 거점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예를 들면, 당진에는 기지시리機池市里라는 마을이 있다. 장시가 섰던 탓에 시市라는 글자가 붙었고,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도 그대로 남았다. 한글로는 틀모시라고 한다. 틀모시장은 조선시대부터 12장이었다. 과거 정기시장을 오일장이라 한 것은 5일에 한 번 장이 섰기 때문인데, 드물게 5일에 두 번 장이 서는 곳이 있었다. 1달이면 열두 번 장이 섰으므로, 12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포구를 통하여 물산이 드나들었고, 다시 소상인들은 지역 거점이 되는 장시를 중심으로 주변 장터를 순회하였다. 백성들에게 익숙한 상인은 등짐으로 내륙 곳곳을 누볐던 부보상들이었다. 소몰이꾼은 마방에 묵으면서 여물을 먹인 후 새벽길을 이동하였고, 등짐장수들은 때로는 길가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새벽에 나서서 장을 보고 나서 어스름에 집으로 돌아온다. 1960년대까지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조선후기 농민들은 이러한 장터를 통하여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장시가 사회적 교류의 장이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의 소식은 이웃 마을 사람으로부터 들었고, 원거리의 소식도 상인들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전파되었다. 임진왜란 때 부보상들이 맹활약을 했고, 조선 말 정부에서 부보상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은 모두 상인들이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난장의 놀이판
장터의 상인들도 이벤트를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대목이 될 시기를 택하여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마당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세벌 김매기, 만물을 끝낸 음력 7월 백중절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은 시기였다. 주인들은 머슴에게 새 옷을 해주고 용돈도 두둑하게 주었다. 장터 상인들은 그 호주머니를 노렸다. 놀이패까지 불러 모아 난장판을 펼쳤으니, 이것이 곧 백중(난)장이었다. 백중장은 머슴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여 머슴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난장이 백중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장시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한강의 송파장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시작으로, 초파일, 단오절, 백중절, 한가위 등 명절 때마다 놀이패들을 불러 모아 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판을 벌였다. 특히 백중절에는 7일 동안 놀이판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경상우도에 속하는 합천의 율지, 의령의 신반, 진주, 산청, 마산, 충무, 고성, 창원의 진동, 남해의 가락, 거제, 사천의 가산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오광대놀이 또한 큰 장시 또는 조창漕倉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오광대놀이는 동래의 들놀음野遊와 함께 초계 밤마리 장터[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통영 오광대는 정월 14일의 세시행사였다고 전하나, 뒤에는 3월 보름, 4월 초순의 봄놀이, 9월 단풍놀이 등에서 놀았다고 하고, 고성 오광대는 정월 대보름과 한가위에 판이 섰다고 하며, 동래 들놀음은 동래장터 사거리에서 수백 개의 등을 달고 놀았다고 한다. 이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와 7호, 그리고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지시장의 이벤트로는 인근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줄다리기가 있었다. 윤년이 드는 해마다 지름 1m 굵기의 거대한 줄을 제작하고, 인근 마을을 물 아래와 물 위로 나누어 줄을 당겼다. ‘줄다리기를 하는 난장’이라 하여 ‘줄 난장’이라고 했고, 과거에는 칠석 즈음 씨름 난장도 열렸다고 한다. 장터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의 행사였으므로, 이곳을 관할하던 예덕상무사 기지시 임소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 “줄 난장 한번 하면 3년 먹을 게 나온다.” 하였고, “난장이 서면 양조장 샘이 마른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벤트를 통하여 상인들은 막대한 이문을 남겼던 것이다.
장터의 민속은 조선후기 상업 발달을 주도했던 장시발달의 파급효과인 셈이다. 서천 남산장은 더 극적이다. 전통시대 시집을 간 여성은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보통은 시집살이 3년 만에 근친覲親을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형편상 친정 나들이가 여의치 않았던 경우에는 친정과 시댁 중간지점에 경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모녀가 상봉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를 반보기라 하였는데, 이 용어가 생기면서 근친을 가서 친정에서 하루를 묵는 것을 온보기라고도 하였다. 서천에서는 추석이 지난 8월 17일에 서천장 자체를 남산으로 옮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근 부녀자들이 모두 모여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시집간 여성들이 단순하게 친정 나들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들에 의한 난장이라는 방식을 택하여 여성들의 축제를 개최했던 것이다.
서천에서 남산장을 열 때에는 ‘내세운다’는 표현을 쓰는데, 경기도 일원에서 백중장을 ‘백중 세운다’고 하는 표현과 맥이 통한다. 난장을 적극적으로 알린다는 뜻일 것이다. 상인들은 난장을 세워서 농민들을 불러 모으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홍성군 결성면 용호리 옛 용호장의 상인들은 조선 고종 때의 5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창룡을 초청하여 공연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농민들은 김창룡 명창에게 배운 가락으로 들일을 할 때에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결성농요의 유래가 그러하다. 장터는 조선후기 이후 예능의 발전을 배태하는 요람이었던 셈이다.
장터의 쇠퇴, 그리고 무형문화재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나, 장터에서 술 한 잔을 걸치고 팔자걸음으로 귀가하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처럼 장터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생활에서 활력소가 되었던 곳이다. 특히 난장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은 농민들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터의 놀이판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박한 놀이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해야 했다. 때로는 주변 농촌의 놀이를 통합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항 후 다양한 예능 장르들이 소개되면서, 옛 장터의 민속들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판소리가 창극에 밀렸고, 놀이판은 서커스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장터가 유지되는 상황일 때의 모습일 뿐이다. 장터가 쇠퇴하고, 또한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장터를 배경으로 했던 전통 공연문화는 과거의 추억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명맥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1960년대 이후 무형문화재로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부 종목이 관광 상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글·오석민 충남역사박물관장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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