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전통적인 수묵화가 등장하기 한 참 이전인 고구려시대에는 비단이나 종이가 아닌 무덤의 천정과 벽에 채색으로 장식한 벽화 그림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벽화는 붓과 색채를 이용하여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회화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소재는 일반적으로 묘주 생전의 안팎의 생활 모습 이를 테면 출행장면, 수렵활동 및 종교활동과 같은 바깥 생활에서부터 연회 장면과 손님맞이와 같은 집안의 실내 생활에 이르기 까지 묘주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묘주 초상은 대개 무덤방의 정면 안쪽인 북벽에 묘사되었다.
묘주상은 고구려 초·중기의 고분 벽화에서 거의 빠짐없이 발견되고 있는데, 묘주 초상화가 이처럼 중요한 소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배경은 고대인의 생사관과 무관치 않다. 고대인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영혼불멸사상과 사후(死後)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계세사상을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사자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안식하게 될 거처에 현세에서 누렸던 권세 및 부귀영화를 담은 벽화들을 장식하여 그 모든 복록이 내세에까지 이어지도록 기원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벽화 제작 시, 무덤 즉 지상 위의 명계(冥界)가 누구의 것인지를 명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으며, 종종 이름과 신분이 적힌 명문이나 묘주의 초상화를 통해 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초상화는 주인공 살아생전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고분벽화 속의 묘주상은 죽은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안악3호분의 묘주초상은 남편과 부인을 각기 서로 다른 벽에 따로 묘사하고 있다. 주미(?尾)를 들고 근엄한 모습으로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남편의 좌우로 시종들이 업무를 보고하고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백라관과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주미 그리고 장막 옆 기둥에 세워놓은, 3단으로 이루어진 절(節)은 남편이 매우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평면적인 얼굴에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초점을 잃은 시선, 긴 코, 짧고 도톰한 입술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왼쪽 옆벽에는 한껏 몸치장을 한 후덕한 모습의 귀부인 아내가 몸을 살며시 틀어 앉아 남편을 응시하고 있다.
안악 3호분과 시기적으로 그리 멀지 않고, 유사한 풍격을 보여주는 묘주상은 408년에 제작된 덕흥리 고분벽화이다. 휘장이 드리워진 장막 아래에 오른 손으로 주미를 들고 팔 받침인 삼족빙궤(三足憑机)에 기대에 정면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안악3호분의 묘주상과 비슷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두면서 모델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내고 있는 것과 달리 벽화 속의 묘주 초상화는 주인공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지물이나 의관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이 비슷한 모습으로 개성을 찾아보기 힘든, 매우 관념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이 바로 후대의 인물 초상화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기의 고분벽화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는 372년 고구려의 국가 종교로 공식 인정되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고구려로 전래된 불교도 고구려 사람들의 사후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전 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죽은 후 부처님이 주관하는 극락정토에서 영생을 얻기를 기원하였고 그러한 염원은 고분벽화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불교가 한 참 성행하던 5세기 후반에 제작된 쌍기둥 무덤벽화의 묘주부부상을 살펴 보면, 초기의 예와는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점이 초기와는 달라진 사후 세계관의 변화된 모습을 알려준다. 휘장이 늘어진 장막과 정면형으로 앉은 묘주 부부의 모습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것이지만, 장막 아래의 기와 건축물과 묘주 부부 뒤에 병풍대신 세워진 역삼각형의 등받이는 새롭게 등장 하는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바로 초기 불교 미술에서 유행한 미륵보살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기 불교 미술이 찬란하게 꽃을 피운 서역의 석굴벽화에는 기와로 이루어진 건축물 아래에 삼각 등받이를 받치고 앉아 있는 미륵보살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기와 건축물은 바로 미륵보살이 거주하는 도솔천의 천궁(天宮)을 표현한 것이다. 쌍기둥 무덤의 묘주 초상화는 바로 미륵보살의 천궁을 자신들의 사후 초상화에 재현시켜 놓음으로써, 도솔천에서의 영생을 갈구하는 간절한 염원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묘주초상화는 불교적 색채를 보여주는 중기 고분벽화에서 유행하였던 공통적 양식이다.
이처럼 무덤 속의 묘주초상화는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제작한 관상(觀賞)적 성격의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사후의 이상적 세계에 거처하는 자신 혹은 조상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상의 사실성 보다는 대상이 거처하는 곳과 그 성격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였던 것이다.
비록 무덤 속의 주인공인 묘주의 초상화가 이른 시기부터 출현하기는 하였어도, 고대에는 현전하는 조선시대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사실적 의미를 담은 초상화가 탄생하지는 못했다. 묘주 초상화는 다만 어느 한 개인이 아닌, 동일 시대에 동일한 사후 세계관을 공유하던 고구려인들의 공통된 의식과 염원이 반영된 집단적 초상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어두운 무덤 안에 오직 사자만을 위해 제작된 벽화들 속에 초연히 앉아 있는 묘주 초상화는 바로 고구려인들의 공통적 시대성과 예술성이 반영된, 관념적 성격의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덤 속의 묘주 초상화를 바라보면, ‘성상(아이콘)’에서나 느낄 수 있는 초월성과 신성함이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 문화재청 대국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김진순 감정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