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그리고 구둔역
양평의 봄은 더뎠다. 강원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경기도 양평의 초봄은 아직 쌀쌀했다. 하지만 더딘 걸음이 완연한 봄에 도착하면 그 어느 곳 보다도 푸를 것이다. 양평은 산이 많고 수량이 풍부해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곳이다. 때로는 산위에 눈이 가득하나 평지에는 봄이 찾아오는 듯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양평에 ‘산당’이라는 이름으로 여행 같은 인생길에 잠시 머물 보금자리를 마련한 임지호 요리연구가는 온도의 기복이 심하고 스릴 넘치는 이곳이 참 좋다.
“이곳도 잠시 머무는 곳이 될지 몰라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나의 운명이죠. 길이 만들어진 곳에 가지 않아요. 내가 가는 길이 나의 길이에요.”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 보다 길이 없는 곳을 가는 것이 그에게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 미지로 가득한 곳은 두려움도 존재하지만 결국은 환희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믿는 그. 그에게 펼쳐진 새로운 길을 가는 삶은 영혼을 한 층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다.
“봄은 도전이에요. 긴 잠을 자고 나서 새싹을 터트리는 봄의 움직임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도전이죠. 생명은 느낌이고 사랑은 시각이에요. 이 모든 것이 발효의 과정과도 같아요.”
그의 요리가 유명한 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음식의 재료를 향한 소박한 마음과 요리를 담아내는 정갈한 마음에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양념은 사랑이었다. 그에게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인생의 비밀을 풀어 주는 실마리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오랜 참음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발효의 과정을 거친 양평에 더디게나마 찾아오고 있는 봄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엔 이미 설렘이 가득하다. 초봄을 느끼며 오랜만에 구둔역을 향하는 그의 마음에도 노란 봄이 왔다.
추억, 그리고 구둔역
구둔역을 지나는 중앙선에는 그의 추억이 실려 있다. 느지막이 아들을 얻으신 아버지는 그가 자랐을 때 이미 나이가 지긋하셨다. 나이 드신 아버지와 함께 계란을 까먹으면서 서울 누나 집을 향했던 그 완행열차는 잊을 수가 없다. 기차에는 늘 먹을 것이 풍족했다. 그리고 다른 언어를 쓰던 지방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언어도, 사람도 풍족했다.
“역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죠. 그리고 각각의 사연이 있는 곳이에요. 어떤 권위의식도 찾아 볼 수 없고 그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친구 같은 곳이 역이에요.”
사람이 북적대는 도시 역과는 달리 초봄 안개가 자욱한 양평의 이 작은 구둔역 아침은 사람의 흔적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작은 간이역이 그 어떤 역보다도 역을 추억하고 그 때를 느끼게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가 되었다. 구둔역에는 간간히 화물차가 지나치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낡은 스피커에서 그 움직임을 알리는 소리가 구둔역의 고요함을 심심치 않게 해주고 있었다. 구둔역은 1940년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중앙선이 지나는 역으로 10여년 전만해도 제법 사람들이 북적이며 기차로 그들의 사연을 싣고 이곳을 떠났다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통과 열차만이 구둔역의 가장 흔한 손님이 되었고,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세 번 설 뿐이다. 이제 역 내에서 발권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차표를 구입하는 부스도 없는 이 구둔역은 곧 중앙선 복선화 공사 후 폐선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곳이 가진 역사성과 서정성 때문에 등록문화재로 이미 지정 되어 새로운 생을 맞이하고 있다.
“구둔역을 처음에 만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초창기에 관리를 해오던 사람들은 이미 구둔역을 떠났겠지요. 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해요. 돌멩이 하나하나, 문 손잡이의 때에서 조차도 그들의 체취가 전해지지요. 그리고 그 체취는 감흥을 전달해줘요. 구둔역이 그 기능을 조금씩 잃고 있어도 지금까지 잘 지켜온 것은 이곳을 스친 사람들 때문이죠.”
구둔역을 돌아보니 구석구석 재밌지 않은 곳이 없다. 역 앞마당 작은 연못이며 토끼와 닭이 옹기종기 살고 있는 장 등 구둔역의 풍경 속에 모두들 함께 하고 있다. 그가 역을 둘러보니 삐걱 소리를 내며 역무원이 다가온다. 그는 그와 비슷한 그 역무원과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하며 금세 친구가 되어 버린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모처럼 구둔역에 울려 퍼져 저 멀리 시간을 되돌리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올 것만 같다.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사라진 그, 손에 무언가를 들고 구둔역으로 다시 달려 들어온다. 손에 있는 것을 역무원에게 선물이라며 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배호의 음악CD였다. 얼른 구둔역의 스피커에 연결을 하자 인적 드문 구둔역에 처음으로 감칠 나게 배호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는 그가 가는 길을 즐기는 사람이 분명했다.
사람, 그리고 구둔역
“구둔역은 요리를 먹고 난 뒤 상큼하게 끝 맛을 즐기는 디저트 같은 느낌이에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디저트를 먹고 난 뒤 그 맛을 잊지 못 할 것 같아요. 여행은 기억이기도 하니까요.”
언뜻 보면 몇 분이면 족히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구둔역의 규모이지만 그는 배호 음악을 틀어 놓고 여유롭게 구석구석 누군가 묻힌 손때에 자신의 손길을 더한다. 더불어 역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와 진한 커피한잔을 나누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여행의 즐거움에 빠지는 그에게 구둔역에 대한 추억 하나가 더해진다.
“문화재는 영원한 향기를 향한 그리움과 같아요. 그리고 음식의 뿌리와도 같죠. 음식의 뿌리는 하늘을 여는 열쇠에요. 문화재들이 잘 관리 되고 있다는 것은 민족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얘기에요.”
그는 문화재를 대할 때 사람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문화재가 꿈틀거릴 수 있다고. 행동하는 양심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귀한 것에 애정과 눈빛을 주는 것이라고. 우리네 음식을 연구하며 우리의 문화재도 함께 공부했던 그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문화재가 본래의 모습대로 항상 우리 곁에 남아주기를 바랬다. 구둔역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오래된 향나무 아래에서 오늘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며 잠깐 만난 인연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에게 언젠가 ‘구둔역’ 이라는 제목의 디저트가 만들어지길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방랑식객 임지호ㅣ 어린 시절부터 전국을 떠돌며 요리를 배웠던 임지호는 10년 전쯤 지인들이 만들어준 양평의 ‘산당’에 잠시 머물고 있다. 하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을 그는 오늘도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자연 속에서 터득한 맛을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임지호. 자연요리연구가로 UN 한국 음식 축제, 캘리포니아 사찰 음식 퍼포먼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식 시연회 등 해외에서도 명성을 떨친 그는 한국 전통음식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표장과 ‘경기 으뜸이’로 선정이 되었다. 음식은 종합 예술이고 약이며 과학이라는 지론 속에 그의 음식은 날마다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영혼에 위로를 주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그의 행복이며 꿈이다.
글·김진희 사진·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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