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부신시가지로 도청이 이전된 뒤 옛 도청사 건물과 감영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감영 복원 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전주’라는 도시가 행정중심도시로서 그 역사성이 지대하여 시민들이나 도민들에 감영은 또 다른 지역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라감영은 전라도를 다스리던 요즘의 도청과 같은 행정관서이다. ‘전라도’라는 행정구역명칭을 사용한 것이 1018년이므로 올해로 딱 991년이 된 셈이다. 물론 ‘감영’이라는 말이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한 지역을 다스리던 행정관청의 소재지는 줄곧 전주였다. 전주라는 도시가 왜 전통문화도시인가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이점에서부터 출발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전라감영에 대해 무지하다
전라감영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특히 전라감영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 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사료(史料)가 부재한 까닭이다. 1392년에서 1395년 사이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감영은 1410년을 전후해서 1차 확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감사(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비롯하여 많은 감영의 건물들이 불에 탔다. 그 이듬해 선화당은 곧바로 복구되었으나, 전쟁에 의한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건물들은 완전하게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1734년 전주성에 대한 대대척인 개축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767년에는 대화재로 인해 선화당 등 관아건물 100여 동이 피해를 입었다. 이 때의 화재로 민가 1,000여 호가 불에 타버렸다고 하니 새로 개축된 전주성 안이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것이다. 감영 건물은 이해 가을에 부임한 관찰사 홍낙인에 의해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1771년에 이르러서야 그 위용을 갖출 수 있었다.
우리들이 고지도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전라감영은 이 무렵의 모습들이다(사진 1).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점된 뒤 지방행정관청의 재산은 조선총독부의 관할 아래에 놓이게 된다. 전라감영의 소유의 토지와 건물들은 전라북도로 인계된 듯하며,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전라감영 내 부영(府營), 즉 전주부를 다스리던 행정관청(현 기업은행 일대는 이아[貳衙]라 해서 전주부의 행정관청들이 밀집해 있었다)은 전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21년 새롭게 2층 건물로 신축된 전라북도 도청은 이후 옛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건물들을 차츰 허물고 새로운 시설을 지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무기고 폭발사고로 선화당이 불타고 1950년~60년대를 거치면서 도로 확장 등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감영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왜 사진이 남아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것이 1870년대라고 하니까 사진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적 상한은 130년이다. 전주에 와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1894년 전후의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므로 전주의 사진은 11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감영 시설의 일부들이 남아 있었을 터인데, 선화당을 비롯한 감영 건물들에 사진은 한 손을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과 정문에 해당하는 팔달문과 풍남문이 함께 보이는 사진, 전주부를 다스리던 음순당(일제시대 전주군청) 건물 사진 뿐이다.
왜 이렇게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일제시대 통치기구로 계속 사용되었고, 또한 부속건물들은 고위 일본 관료들의 관사와 군.경찰 시설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사진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지만, 없어도 너무 없다는 느낌이다. 사진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이거나 찍어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진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 못 찾은 것이다’라는 표현이 보다 적합할 것이다. 일제시대 전주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을 추적해 가다 보면, 분명 조선시대 감영 건물들이 담겨있는 사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객사 파괴에 대한 오해와 진실
사진은 영상으로 남겨진 사료이다. 조선시대 그림이 시각자료로서 후대에 전해진 정보라면 사진은 카메라의 발명에 의한 영상 정보인 것이다. 근현대 연구자들이 사진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사진에 의해서 많은 오해들과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의 사진은 문헌연구를 통한 오류의 가능성이 얼만큼인지를 알려준다. “풍패지관”하면 잘 모르시는 분이 아직도 있겠지만, “객사(보물 583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럴 것이라 생각되지만 객사 앞은 핸드폰이 없던 시절 중요한 만남의 약속 장소였다. 객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전주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중앙에 “풍패지관”이라 새겨진 건물과 좌우에 그보다 작은 규모의 건물(익헌[날개건물])이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동쪽 날개 건물이 없었으며, 1999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따라서 “풍패지관” 사진은 모두 동쪽 익헌이 없어진 뒤의 모습뿐이다. 물론 “풍패지관”의 전체 모습이 남아있는 사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지붕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912년 발간된 《금난부》에 실린 “풍패지관”의 모습이다(사진 2). 원래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을 당시만 해도 전주객사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07년 성벽철거령을 내린 일본의 파괴행위는 전주도 예외일 수 없었고, 1914년까지 지속된 조선시대의 흔적지우기는 성 안에서도 이루어졌다. ‘근대적’ 도시계획을 추진한다는 핑계로 일본은 풍남문과 북문(국민은행 뒤 오거리)을 잇는 일직선의 도로를 개설하여 ‘T'자형 도시구조를 파괴하고 전주성의 가장 핵심기관인 객사의 동쪽 날개건물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이 사진은 객사의 동쪽 날개 건물을 허문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파괴의 흔적이 채 정리되기 전의 모습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912년 신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한 책에 실려 있기 때문에 이 사진이 찍힌 시점은 아마도 1911년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시기 추정으로도 우리는 지금까지 객사의 동쪽 날개건물을 허물었던 시점에 대한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지금까지 객사를 설명해 놓은 책자들을 보면 모두가 1914년 도로 확장으로 허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4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객사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강점 직후 일제에 의해 바로 객사가 훼손된 것이다. 일제에 의한 전통 도시의 파괴는 강점과 함께 곧바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객사 파괴가 동쪽 날개건물을 없애버린 것은 물론 객사 주위의 모든 부속 시설들까지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파괴와 훼손은 멈추질 않았다. 《전주부사》에 의하면 일본은 객사 마당에 벚꽃을 심고 1921년 이후 전라북도물산진열소(사진 3, 후에 산업장려관)로 사용하는 한편 연회장으로 여러차례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7년 산업장려관이 이전한 뒤 전라북도교육참고관이 설치되었고, 그 사이에 남문의 서쪽에 있던 종각을 이전하고 정원에는 대포와 3층 석탑을 옮겨 놓았다.
바로 이 3층 석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있다.(사진 4) 당시 전북공립고등여자교 여학생들이 놀러 와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땅바닥에 시멘트로 기초를 만든 뒤 기단부를 대리석으로 덧씌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려놓은 것을 알 수 있다. 3층 석탑을 온전하게 옮긴 것도 아니고 기단부를 파괴한 채 윗 부분만 객사 앞으로 갖다 놓은 것이다. 1922년 익산 왕궁에서 옮겨온 이 탑을 지금은 덕진공원에 가면 볼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모습과 똑같이 대리석으로 감싼 기단부까지 그대로 옮겨 놓았다.(사진 4) 왕궁면 어딘가에 있었을 이 백제탑에 대한 설명은 누구도 해주질 않고 있다. 파괴된 기단부에는 일제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지금도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객사의 핵심 기능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정점에 있는 것이었다. 중앙의 관리들을 접대하는 기능을 포함해서,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망궐례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근대 조선시대의 통치지배시스템을 상징하는 의례행위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의한 객사의 파괴는 단순히 전통문화의 망실이 아닌 조선시대의 지배구조를 와해시키려는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99년 동쪽 날개건물의 복원은, 그것이 옛 모습 그대로의 복원은 아닐지라도(「객사서헌기(客舍西軒記」에 의하면 서쪽 건물이 동쪽 건물에 비해 낮고 좁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 대민행정의 복구라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기록이다. 매체가 다원화되면서 시각자료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는 것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갖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진 기록은 그 공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미묘한 행간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풍패지관”의 사진들을 보면서 그런 행간을 읽어내는 묘미는 바로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작업이다. 해방 후 전북대학교의 전신인 명륜대학이 향교가 아닌 객사에서 출발했음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