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창살 속 모진 젊음 스쳐간 전주교도소

chamsesang21 2009. 9. 26. 08:20




유진오, 이흡, 이광웅, 김남주, 신영복, 김하기, 정도상……. 이들에게 세상은 유죄다. 어느 한 세월, 해가 뜨고 지면서 쌓이는 일상과 전혀 다른 시기를 겪었던 탓이다. 전주시 평화동 전주교도소. 가둬놓으려는 권력과 벗어나려는 인간. 그들의 충돌. 자유의지. 그곳에는 굴곡진 인생이 있고, 억울한 이야기가 있으며, 굴곡과 억울한 사연을 낳는 사회 부조리와 모순이 있다. 자유를 잃고 좁은 공간에 갇힌 이들의 더 아름답고 치열했을 청춘을 어느 누가 되돌릴 수 있을까.


전주교도소와 문인들의 악연은 1934년 '신건설사사건' 혹은 '전주사건'으로 칭해지는 제2차 카프 검거사건으로 시작된다. 카프의 연극부서인 신건설사가 전주에서 연극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공연하고 있을 때, 삐라가 발견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으로 이기영·한설야·최정희·윤기정·송영·유곤강·이동규·권환·백철·박영희 등 23명이 연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프 진영의 사회주의 문인 대다수가 전향하게 된다. 전주법원에서 벌어진 재판 장면은 김남천의 3회에 걸친 상세한 방청기(당시 조선중앙일보 특파원)가 남아 있으며, 그 이후의 상황은 한설야의 「이녕」(1939)과 김남천의 「등불」(1942)에 묘사돼 있다. 출옥한 주인공이 보호관찰소의 알선으로 창고회사에 취직한 것이 「이녕」이며, 모회사 구매계에 취직한 것이 「등불」이다. 입에 풀칠하기는 해결될지 모르나 이런 굴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작가의 모럴한 감각이 운명처럼 그려져 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20여 일간 벌어진 '광란의 살육'도 전주교도소의 아픈 기억이다.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사상범 1천6백여 명이 다급해진 CIC와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신경득의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2002·살림터) 참고) 현재 농협전북본부와 완주군청이 있는 자리, 전주농고 동문 쪽 야산, 진안으로 나가는 소리개재(솔개재), 건지산, 황방산으로 끌려가 총살, 암매장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며칠 후 이곳 전주형무소에 헌병대가 들이닥쳐 수감중인 사상범 등을 몽땅 트럭에 싣고 가 학살해 버렸다는 것이다. 수감자를 겹겹이 포개듯이 가득 실은 트럭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보고 전주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공포감에 빠졌고,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류춘도의 『벙어리새』(2005·당대) 136쪽

 

'명예스러운 인민의 계관시인' 유진오

시인 유진오(1922-1950)도 이 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체포, 1949년 10월 군법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던 유진오는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돼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고, 이흡은 '6·25 직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동란이 발발하자 총살'되었다고 알려졌었다. 특히 완주군 고산면 출신인 유진오는 해방공간에서 격정의 젊은 시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시집 『창』(정음사·1948)에 서문을 쓴 시조시인 조운도 그를 '기백과 정열의 시인, 시의 육탄이라는 민주청년'으로 일컬었다. 꽤 긴 시에 속하는 「창」의 몇몇 시행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성(城)을 사이에 터를 갈라/창들과 창들은/어제도 오늘도 바라만 보고 있다' '도적이 두려워/어둠이 무서운 아름다운 창들엔/권력과 함께/부유한 도적이 살지 않느냐' '아아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도와 부자에겐/철창(鐵窓)을 주라.' 시편들은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선동적으로, 선정적으로 밀어붙인다. 

 

왜놈들의 씨를 받아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머리를 숙여
생명과 재산과 명예의
적선을 빌고 있다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유진오가 1946년 국제청년데이 기념식장에서 낭독한 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의 한 부분이다. 외국군 주둔으로 변질된 해방의 의미와 미군정청 아래서 여전히 권세를 부리는 친일파를 성토한 이 시는, 군정정책을 왜곡,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해방 후 첫 필화(筆禍)문인을 탄생시킨다.

'절제된 언어의 맑은 서정과 혁명의 이광웅, 그리고 오송회

유진오의 시를 흠모했던 시인 이광웅(1940-1992)은 '유진오는 죽음 앞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변절하지 않고 의연했던 뛰어난 시인'이라며 '그의 시 세계에 심취해 역사와 현실을 옳게 보는 힘을 배웠다'고 말한다. 광주특사에서 이감되어 1년여를 보내야 했던 전주교도소에서 시인은 그 자리에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한 시인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이광웅은 '오송회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학의 진실한 힘에 눈을 뜨고 역사를 직시하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한 대가로, 40대 절반 이상을 차가운 철창에 갇혀야했으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용공주의자로 몰렸다. 생전의 그가 '누군가 시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웃었었노라'고 말한 오송회 사건은 1982년 겨울, 한 학생이 전주-군산간 시외버스에 놓고 내린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 필사본으로부터 시작된다. 월북 시인의 글을 읽었다고 빨갱이로 몰리는 '시뻘건' 세상. 월북작가의 시집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문학을 함께 논하던 군산 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되었다.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이옥렬, 황윤태, 강상기, 채규구, 엄택수와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으로 근무하던 조성용이 그 슬픈 이름이다. '잡아다 족치면 간첩단이 만들어지던' 시절, 죄 아닌 죄로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되어 20여일 모진 고문 끝에 이들은 교사간첩단으로 둔갑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강상기 시인도 옥고를 치렀다.

 

강가에 섰다./구겨진 내 몰골이 물속에 거꾸로 박혀 있다.//오송회 생각났다./국가보안법이 생각났다./고문 기술자가 생각났다.//낡은 유람선이 지나갔다.//물속의 하늘 바닥, 그 끝모를 기억 속으로 깊어지면서/삼십대 초반 격정의 내 삶이 물거품으로 부서졌다.//수면 위 흰구름 속으로 사라지는/광웅이가 보였다.//강가에, 그날처럼/나의 구겨진 몰골이 거꾸로 서 있다.

강상기의 시 「어떤 날」 전문

 

주동인물로 꼽혔던 이광웅 시인은 7년형을 받아 사상범들을 수감한 광주 특사 독방에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전주교도소로 옮긴 1년여 만인 87년 6·29선언에 의해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6·29선언이 수많은 민주화열사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고 보면, 시인은 민주화를 열망한 대가로 온몸을 묶여야했고, 또 그 자신이 희생한 덕분에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던 셈이다. 시인은 4년 8개월, 감옥에서의 생활로 삶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노라고 말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도 감옥에서였고, 삶에 대한 가치, 인간의 신념, 분단민족의 아픔에 보다 절실한 의식을 갖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기조차(필기도구)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운동하며 주워온 못을 갈아 우유곽에 시를 썼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해 책표지를 뜯어 붙여놓는 방법으로 시편들의 생명을 지켰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빛을 본 것이 「바깥의 노래」「바람의 손길」「햇빛 한참」등이다.

 

사과꽃이 아름답게 피고/실개천엔 착한 노래/푸른 봄 햇빛./님은 가시고/봄은 오시고/하늘끝 벋어간
슬픈 평행선.//옥중에서 불러본다./무심히 떠오른 바깥의 노래./드높은 담벼락 안에서도/사과꽃은 흐드러지고……

이광웅의 시 「바깥의 노래」 중에서

 

높고 높은 담의 안쪽에서 시인은 '옥방에서 부화한 하얀새는 죽었다'며 절망하다가도 철창에 흘러든 햇빛을 가슴으로 안으며 '얼어붙은 오늘 이 죽음의 땅에 봄맞이 서두르는 새들의 궁리. 산같은 침묵을 깨뜨리고 새봄을 구가할 꽃들이 합창하는 따뜻한 봄날이 멀지 않았다'고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그의 긴긴 날들을 채웠다.

 

감옥 안에 있을 때 내 생애에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될 사람들을 만났어요. 분단 민족으로서의 비애를 껴안고 그 소중한 삶을 자신들의 신념 속에 아낌없이 바친 그 분들을 보면서 저들의 고통에 비하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마음을 다지곤 했지요.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로운 것인가도 깊이 깨닫게 되었구요.(문화저널 1990년 11월호)

 

'감옥에서 나온 후 가슴으로 끓어오르는 수많은 언어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곤 했다'던 시인은 출옥직후 1년 반 남짓한 동안 씌어진 시와 감옥에서 썼던 시편들, 그리고 습작기 시절의 시편까지를 묶어 시집 『목숨을 걸고』(창작과비평사)를 냈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 극도로 절제된 서정-정말이지 조심조심 쓰셨군요. 저 무지막지한 고문, 저 억울한 철창생활을 당신은 정말이지 잔잔히 고발하시는군요. (중략) 아침이면 비구름 저쪽으로라도 해가 뜨듯이 그걸 종이 위에 살려놓으시는군요.' 시집의 서문에 문익환 목사가 써놓은 글처럼 그의 시들은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그 맑은 서정성으로 닦아내면서 언어의 생명력을 더욱 생생하게 울려내고 있다. 그가 만났던 시인들의 적지 않은 시편들 속에서도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시 「너무 맑아서 불온한 사람 이광웅」은 5공화국 시절에 어이없이 간첩단으로 몰렸던 시인의 인간됨을 절절하게 회고하는 이야기다.


우유곽에 못 같은 것으로 꾹꾹 눌러 쓴, 김남주

'우유 곽에다 못 같은 것으로 꾹꾹 눌러 쓴' 시들은 김남주 시인(1945~1994)의 『나의 칼 나의 피』(실천문학사)에도 담겨 있다. 감옥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때로는 우유 곽에 철필로 찍어 가며 쓴 시들은 시인의 뜨거운 숨결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1987년 이 옥중시집이 처음 나왔을 때, 독자들은 도끼로 장작을 패듯 내리치는 그의 직설에 놀랐고, 격정에 타올라 화산처럼 분출하는 뜨거운 신념에 압도되었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너무나도 순정한 영혼에 매혹되었다. 군사정권의 강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시대, 모든 언로(言路)가 막히고 굴절되던 시대, 자그마한 몸집의 시인은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던 이야기 속 누군가처럼 말한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라고. 정직한 언어는 어떤 시적 수사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을 단숨에 장악한다.
1986년 9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중이던 시인이 광주 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면서 떠오른 시상을 적은 시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또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아니면 대전옥일까//나를 태운 압송차가/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청명한' 하늘 밑에 '푸른 옷의 수인'. 이 아름다운 계절에 수인은 '아 집에 가고 싶다'라고 절규한다. 1980년대, 엄혹한 시대에 스스로를 혁명가이자 전사라고 일컬었던 시인이, 8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던 시인이, '여기서 차에서 내려',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고,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고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 풀고 오라 풀고/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고 목놓아 외친다. 민중 해방을 외치던 시인의 철갑 같은 의지에 파묻혀진 인간적인 고뇌가 드러나는 국면이다. 투사도 인간이며, 자유가 그립다는 것, 그것은 '압송차가 멈추지' 않는 상황, 푸른 옷의 수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투사가 '집으로' 갈 날은 언제인가. 그 날에 대한 염원이 너무나 간절하다.
세상은 바뀌어 혁명의 꿈은 깊이 가라앉아 일상의 맥락에서 사라졌고, 갈수록 미지근하고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시가 혁명이던 시절이 있었음을, 시가 우리의 가슴을 치던 시절이 있었음을 뜨겁게 증언한다.
이광웅, 김남주, 김용택 시인은 친 살붙이처럼 애틋한 사이였다. 살붙이 시인들이 한 두 해 간격으로 세상을 뜨고 난 후, 남은 한 시인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게 지독하게' 아팠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의 시 「옛 마을을 지나며」 전문


다 늙은 감나무에
따지 못한 감들이
허연 눈을 쓰고
얼고 썩고 곯아 떨어진다
감나무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해
감가지마다
감들을 썩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김용택의 시 「다시 옛마을을 지나며-남주형 생각」 전문

 

두 시인의 죽음으로 2년 간 깊은 병고에 시달렸던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1995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 좋은 시인이었던 이광웅, 김남주 두 분께 이 시집을 눈물로 바칩니다'라며 시집 『강 같은 세월』을 헌사 한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꽃처럼 피고 진 시인을 슬퍼하며 자신의 삶이 하나의 강물에서 섞여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끝나지 않은 늘 '처음처럼', 신영복

신영복. 전주교도소에는 '기상 나팔 대신 은근한 종소리가 울린다' 는 것을, 그것이 종소리가 아니라 '사람 키만 하고 무슨 포탄같이 생긴 산소아세틸렌 용접가스통을 매달아놓고 나무망치로 몸통을 때려서 내는 소리'라는 것도 그의 편지를 통해 알았다. 그는 1986년 2월부터 1988년 8월까지 전주교도소 생활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엽서』에 담았다. '나는 걷고 싶다'는 37편의 편지…….

 

전북 일원에는 명산과 고찰 등 명소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내장산, 지리산, 덕유산, 대둔산, 마이산, 광한루…….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인공(人工) 중의 인공인 법의 한복판에 유폐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가까운 곳에 명승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별다른 친근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반가운 것은, 거실 창 앞에 서면 동북쪽으로 녹두장군의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략할 때 넘었던 '완산칠봉'(完山七峰)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지축을 울리던 농민군의 발짝소리가 지금은 땅 속에서 숯이 되어 익고 있을 완산칠봉 일곱 봉우리를 그도 옥창(獄窓)을 격(隔)하여 마주하는 감회는 실로 비범(非凡)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낮은 종소리로 잠 깨며, 완산칠봉 일곱 봉우리를 돌이켜보며, 새로운 사람들의 삶을 만나며 시작하는 전주 징역은, 아직은 기약 없지만 백제 땅의 그 어기찬 역사만큼 내게도 큼직한 각성을 안겨주리라 기대됩니다.(1986. 3. 24.)

 

그는 전주를 '동학혁명의 격전지였기 때문에, 변함 없는 산야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한 그루 묵은 나무까지도 묵직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듯'하다고 기억한다. 그곳에서는 전주성 공방의 거점이던 완산칠봉과 당시 동학농민군의 진격로이던 용머리고개가 한눈에 바라보였기 때문이다.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노닐고 이름 없는 잡초들도 뽑히지 않고 무성하게 살아가던 옛 언덕의 시절. 그는 '그 땅의 일우(一隅)에 갇혀 90년 전 갑오년의 현장을 몸소 밟아보지는 못하지만, 『동학기행』을 펼쳐들고, 동학년의 함성과 비탄을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으로 파헤쳐내려는 한 작가의 양심과 발걸음을 따라가면' 그 자신에게도 한동안의 불타던 시간들이 되살아나리라 믿고 있었다.
맴― 맴― 찌― 찌―. 장마가 지나고, 여름 한낮 매미가 울고, 이른 새벽 뻐꾸기가 울던 무심한 세월이지만, 그 속에서 그는 갑오년 녹두의 파랑새 소리를 기어이 듣고 말았으리라.

'운동권 소설가' 김하기와 정도상

1981년 '부림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 받은 소설가 김하기는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감한 이듬해, 「살아있는 무덤」(창작과 비평)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는 1982년 전주교도소 특별사동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80년대 초 모스크바 사동이라던 전주교도소 특별사동 4사의 살벌함. 장기수들의 삶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특별 감방의 체험을 담은 소설을 쓴 것이다. 운동권 출신의 대학교 3학년 제적생이 만난 무기수. 휴전선을 넘어와 남한에서 단 하룻밤 잔 죄로 만 36년하고 일주일을 감옥에서 살다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녘 고향에 송환된 최하종씨 이야기다.

 

비전향 정치범 장기수를 수용하는 특별사동은 15척 주벽과 두 길 남짓 되는 간벽으로 에둘러 포위된 채 유일한 바깥 창구인 변소 뒤창마저 나무판자로 봉해져 한오라기 불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특사 내부는 완전히 밀봉된 고대의 지하왕릉을 연상시켰다. 들어가는 사동 입구에는 이중철문이 녹슨 금강역사처럼 육중하게 팔짱을 끼고 가로막아 섰고, 나방 똥과 털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30촉 알전구가 침침한 빛을 흘리고 있는 길고 음산한 사방 복도는 좌우의 수십 개의 폐쇄독방을 현실(玄室)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몇 마리 야윈 쥐들이 싸늘한 냉기에 콧등을 오들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러 잽싸게 꼬리를 감추었다.
(중략)
박선생은 마지막 한오라기의 삶의 에네르기를 뽑아 올려 밀실의 어둠을 찢으면서 소리쳤다.
"조국통일 만세!"
박선생의 차마 감지 못한 눈동자엔 도살된 소의 까뒤집힌 눈빛이 아니라 푸르게 갠 하늘을 보는 듯한 해맑은 청기가 감돌았고 아직도 핏기가 가시지 않은 붉은 입술엔 한 가닥 슬픈 미소의 꼬리가 물려있었다.
박석기씨를 비롯한 수많은 장기수. 정치범들이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살인적 고문. 폭력의 몽둥이 끝에서 주검으로 화해갔다. 사인은 소내 의무과장의 손에서 심장마비로 처리되고, 시체는 가마니에 둘둘 말려 교도소 뒷문으로 빼내어져 팻말도 없이 뒷산에 묻혀 한 삽의 거름으로 잊혀져갔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과 언론 어느 하나도 항의하거나 위로해주지 않았다.
/김하기의 소설 「살아있는 무덤」 중에서

 


0.75평 독방. 소나 말도 한 달만 갇혀 있으면 우황(憂惶)이 들기 시작한다는 그곳. 때때로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전향테러공작이 가해지던 지옥 같은 그곳의 삶. 전주교도소에서 비전향장기수들만 있는 특별 감방을 체험한 뒤, 남북의 분단과 그로 인해 왜곡되어 온 이 땅의 역사에 눈뜨게 된 김하기는 창작 방향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재에 항거한 경험과 분단에 대한 인식이 맞물려 역사적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이 중심 주제가 되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며 눈물로 밤을 새우던 소설가 정도상은 '내 문학의 지향점은 통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86년 교도소 담장을 타고 흘러나오던 가수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를 들으며, '코미디 같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내 젊음의 빈 노트는 소설로 채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전북대학교 독문학과 재학 중인 1986년 평화의 댐 건설 반대시위사건으로 구속, 1987년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1987년 『창작과비평사』 신작소설집에 발표하면서 세칭 '운동권 소설가'가 된다.
소설은 시대에 복무해야하는 것일까. 어떤 인간도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소설이라는 미궁(迷宮)은, 써야 할 것과 쓰고 싶은 것의 괴리로 작가의 숫하고 숱한 날을 괴롭혔으리라.

전주형무소와 전주교도소

1908년 광주감옥 전주 분감으로 설치된 전주교도소(전주시 평화동)는 지난 1972년까지 진북동 큰모래내에서 전주동초등학교 가는 길목에 있었다. 과거엔 소반처럼 펑퍼짐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반대미' 혹은 '반촌(盤村)'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주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1961년까지 전주형무소라고 불렸던 이곳에는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은 밭에 계절 따라 여러 '남새'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옛 전주형무소의 풍경은 1960년을 전후로 이곳에서 살았던 소설가 이병천과 한상준의 작품에 잘 묘사돼 있다.

 

배곯는 조무래기들은 서리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학교에 갈 때면 출근길에 나선 형무소 간수들이 무심히 딴 곳을 보는 틈을 타, 미끈한 청무를 발로 툭 찬 뒤 가운데가 깊은 가르마처럼 타진 가방 속에 얼른 잎사귀를 떼내고 쑤셔넣어 두었다가 두어 시간 오전 수업을 끝낸 뒤, 참을 수 없는 배곯음을 느끼며 허겁지겁 퍼먹곤 하였다. 간수들도 대개는 형무소 주위 동네나 큰모래내에 거처를 두고 있는 까닭에 혹은 그네들의 자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자식놈 친구들인 연유로, 무를 캐먹거나 배추속을 파먹는다고 깐깐하게 단속하진 않았다.
인후동 큰모래내에 사는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하루살이들로 이루어져 있는 변방의 동네인 데다가 간수들 역시 어린 날을 보냈던 일제시대, 그 시절에 곡물을 강탈당하여 먹을 게 없던 날들을 겪었을 터인즉, 혹은 육이오 전쟁을 통해 풀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대를 살면서 허기에 관한 어린 싹들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형무소 부근 후미진 동네의 그리고 그네들 자식들의 어깨겯이인 배곯는 조무래기들이 무며 배추속을 캐먹을 적이면, 짐짓 딴청 부리듯 외면을 해 준 관대함을 가졌을 거라고 짐작을 하지만. (중략) 학교가 파하면 큰모래내에 사는 애들 대부분은 학교에 갈 때에도 그 길로 갔듯이, 형무소 그 너른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봄철이나 여름 무렵에는 너른밭 아래에 있는 방죽가에서 벽돌 구울 황토를 실어 나르기 위해 도르레를 타고 내려 갔다가 흙을 잔뜩 싣고 올라가는, 가슴팍에 일이삼사 번호가 적혀 있는 푸른 제복을 입은 죄수들을 가끔씩 보곤 하였다.

한상준의 소설 「비탈에 서서 -1955년생 2」 중에서


진밧다리를 지나자 우리는 잠시 서서 형무소 죄수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죄수들은 흙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無蓋貨車)를 이제 언덕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숨을 가다듬는 모양이다. 이 화차를 우리는 '도로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도로꾸는 비록 형무소 것이지만 우리 모래내의 명물이기도 하다. 탄광 같은 곳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거나 역 주변에서 겨우 볼 수 있는 이 차를 반데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언덕 위에 있는 벽돌공장까지 흙을 실어 나르기 위한 차량이다. 죄수들이 일일이 밀어올려야 하니까 차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병천의 소설 「모래내 모래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