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에 앞서
2008년 8월 26일 13시 30분, 서울특별시 도시개발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지금 광화문광장 조성거리 지역에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입회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시 나는 김포 양촌(현 김포 한강신도시)의 발굴조사현장에 있었는데 약간의 고민이 생겼다. 이미 광화문광장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종로 열린 광장 발굴조사도 진행했던 터라 세종로 지하에 육조거리와 관련된 지층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서울 도심의 가장 한복판, 더욱이 중심 도로인 세종로를 발굴한다는 것은 여간 간이 큰 사람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터파기를 진행한 후에 연락을 주십시오! 했다. 그러나 부서의 김주임은 단호했다. 일정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공무원임을 강조하며 오늘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착한 것이 15시 30분 이었다. 당시의 현장은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을 중심으로 약 4m정도의 깊이로 터파기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눈에 뛴 것은 모래층과 펄층 이었다. 세종로 밑의 지하 세계가 드러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동물뼈와 백자편, 토기편 등이 보였다. 순간 적으로 현장에 쌓여있는 흙더미로 눈이 갔다. 하얀색 빛이 서쪽하늘의 저무는 태양에 반짝이더니 용 한마리가 보였다. 철화백자 용문 항아아리 조각이었다. 내 눈에 조선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종로 밑의 토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연 범람층이 아닌 인공으로 조성된 지층이 한층, 한층 보이기 시작했다. 육조거리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러나 좀 더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그 때가 16시 30분 이었다.
육조거리의 조성과 경관 변화
조선 육조거리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이 준공되던 해인 1395년에 조성된 거리다. 광화문 앞에서 황토현(현재의 광화문 사거리) 까지 이르는 조선의 주작대로(현재의 세종로)였던 것이다.
육조거리는 광화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편에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자리하고 있었고, 왼편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사역원 등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복궁과 광화문 그리고 육조거리와 주변의 관아건물들은 보기 좋게 배치되어 조선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아들이 불타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임란후에도 경복궁이 복원되지 않았고,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조거리는 정궁과 함께하지 못한 채 관아거리로만 남아있었다.
육조거리가 다시 제 모습을 갖춘 것은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복원되면서부터이다. 대원군에 의해 정비된 육조거리는 삼군부가 예조 터에 자리잡았다. 흥선대원군은 정치·군사의 양권을 장악한 후 비변사를 폐지하고, 조선초기의 관제대로 삼군부를 다시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맡도록 한 것인데 관아의 배치를 통해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와서 육조거리는 1914년 ‘광화문통’으로 개칭되었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이 이전되고 육조거리 양편에 건설되었던 장랑들은 사라졌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육조거리 관련 사진을 보면 관아를 출입하는 관료와, 분주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상여행렬, 전차가 지나는 광경 등 매우 역동적인 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쇠퇴하고 일제가 강점하면서 육조거리와 주변 관아 등은 허물어지고 관공서가 들어서게 되면서 원래의 경관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육조거리를 발굴하다
육조거리의 발굴조사 지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동 76-4번지 일원이며 현 광화문광장 조성사업부지이다. 시굴조사 결과 확인된 조선시대 문화층을 중심으로 육조거리의 토층 확인조사 및 규모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조사대상지를 중심으로 북쪽은 광화문, 남쪽은 이순신장군 동상, 동쪽은 교보문고, 서쪽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사범위는 남쪽의 이순신장군 동상 앞 태평로 사거리에서 광화문 앞 세종로 4거리로 이어지는 직선거리이다.
과거 이 지역은 이충무공 동상 앞쪽(현 태평로 4거리)에 황토현의 얕은 구릉이 있었던 관계로 남쪽지역이 약간 높고 북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진다.
발굴지점에 대한 지형 및 지질학적 현황은, 육조거리가 조성되기 전에는 하천의 영향을 받은 하성퇴적층과 구릉사면에서 흘러내려온 화강암 풍화토 등이 쌓여 있었다. 조사단에서는 이러한 조선개국 당시의 지형, 지질학적 특성을 판단하여 본 결과 자연퇴적층을 보강한 후, 층 다짐을 하여 육조거리를 조성하였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발굴조사에서는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육조거리의 지형관찰, 지층현황 등을 고려하여 남북 방향의 장축을 가진 트렌치 7개, 동서방향의 장축을 가진 트렌치 3개를 설정하였다. 트렌치는 시굴조사 때 설정하였던 1번 트렌치를 중심으로 발굴조사 성격에 맞도록 재배치하였다. 이는 조사현장 여건상 별도로 구획을 할 만한 상황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육조거리의 발굴은 현 세종로 아스팔트를 걷어내면서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도로로 사용되었던 부분을 아래로 1m 가량 걷어내자 1968년에 철거된 전차 선로의 침목이 확인되었다. 서울전차 선로는 광화문방향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향하던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복선화가 되었으며 이 때 이 지점으로 이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차선로는 1968년 세종로 지하차도 공사로 폐선 되었는데 당시의 철 선로는 현재 없으며 침목, 잡석, 콘크리트 바닥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아래로 4m 까지 평면조사를 하면서 마침내 육조거리의 토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조거리의 지층은 하천의 영향을 받은 자연퇴적층, 자연퇴적층을 보강한 후 조성한 조선개국기 육조거리 조성층, 임진왜란 전후 층, 고종년간의 경복궁 중건기 층, 일본강점기~현대층 등을 확인하였다. 각 지층별 시기구분은 보다 신중해야 하므로 연대측정, 출토 도자기 등의 분석을 통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육조거리는 조선토목기술의 완결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축조방법은 자갈을 깐다거나 큰 잡석으로 기단부를 채운 후 흙을 쌓았다. 그러나 육조거리는 흙다짐을 하여 쌓은 토층이다. 따라서 돌을 쌓아 만든 기술보다 더 정밀한 축조 기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길이 자연재해나 인공적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유지 보수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육조거리 토층 안에서 발견되는 동물뼈, 기와편, 도기편 등은 도로가 유지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조거리, 조선의 상징으로 되살아나다
육조거리는 조선전기부터 현재까지의 지층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시대 주작대로이다. 육조거리의 발견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발굴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1928년에 신설되었다가 1968년 폐선 된 서울전차의 복선 선로 및 침목 등을 확인하였다. 이는 서울의 산업화 도시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과 동시에 유물이다.
둘째, 문헌과 지도를 통해 전해져온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발견하였다. 육조거리의 지층은 주변의 하천과 범람 등으로 퇴적된 자연층, 건국초기(14~15세기), 임진왜란전후(16~17세기), 경복궁 중건기(19~20세기) 등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지층별 시기구분은 보다 신중해야 하므로 연대측정, 출토 도자기 등의 분석을 통해 보완할 것이다.
육조거리는 조선시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따라서 육조거리 조성 이전과 이후의 지질, 고지형, 고환경, 지층의 퇴적물 분석, 연대측정, 수종분석 등 다양한 과학 분석을 실시하여 조선시대 서울의 역사복원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 박준범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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