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궁궐의 현판 懸板

chamsesang21 2009. 8. 16. 11:29

월간문화재사랑
2009-08-06 오후 03:20




현판의 의미와 유래

우리의 옛 건축물들에는 대부분 건물의 이름이나 성격을 나타내는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전통 사대부 집안의 개인 건물들 중에도 그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서원이나 사당, 사찰 등에는 거의 예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건물마다 현판이 있다. 특히 수많은 전각들이 밀집되어 있는 궁궐은 현판의 경연장競演場이라고 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현판들이 즐비하다.

궁궐의 현판은 해당 건축물의 기능이나 성격 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 현판들은 한자를 주요 표기 수단으로 삼던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글 전용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모든 문자文字 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서가 근래에 출간되어서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수많은 개개 현판에 대한 설명은 전문 해설서에 맡기고 여기서는 주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한다.



현판懸板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담고 있는 말은 편액扁額이다. 현판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단순한 뜻이고, 편액은 ‘건물의 문 위 이마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이다. 편扁은 호戶와 책冊이 합쳐진 글자로 ‘문 위에 써 놓은 글’을 뜻하고, 액額은 이마라는 뜻이다.

현판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전하는 말로는 중국의 진秦 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문헌상에 구체적인 기록은 한漢 나라 때부터 보인다. 한 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인 소하蕭何가 서서署書라는 글자체로 두 궁궐에다 각각 ‘창룡蒼龍’과 ‘백호白虎’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중국의 한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현판의 풍습도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현판은 분명하지 않다.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麻谷寺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신라 명필 김생金生이 썼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신라 이후 몇 차례 폐사廢寺 되었다가 다시 세워졌으며 대웅보전도 조선시대 건물이어서 신빙성이 약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안동 민속박물관에 보관된 ‘안동웅부安東雄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모두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안동웅부安東雄府’의 모각품模刻品이 안동 시청에 걸려 있다.




궁궐 현판의 명명命名 원리

궁궐의 현판은 건물의 용도와 성격에 맞추어 지은 것이 상당수인데, 대표적인 방법이 경전經典이나 기타 문헌에서 따온 것과 오행五行의 원리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순수하게 글자의 의미를 조합하여 지은 것이다. 각 궁의 정문은 공통적으로 ‘화化’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것이다. 이 정문의 이름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 각 궁의 정전正殿 이름이다. 정전의 이름은 공통적으로 ‘정政’자가 들어간다. 경복궁은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은 인정전仁政殿, 창경궁은 명정전明政殿,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이다. 여기에는 유교 국가로서 조선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다.

정전의 이름에 ‘정政’자가 들어간 것은 금방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정문에 쓰인 ‘화化’자도 결국 바른 정치와 관련된 말이다.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다 워낙 가치를 높게 두어서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지만, 유가적 관점에서의 정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교화敎化를 더 우선시하였다. 그래서 각 궁의 정문 이름에 교화를 뜻하는 ‘화化’자를 넣은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정문인 광화문을 제외하고 동쪽의 건춘문建春門과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북쪽의 신무문神武門은 오행五行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오행을 계절로 따지면 동쪽은 봄이고 서쪽은 가을이다. 북쪽은 계절을 적용한 것이 아니고 ‘현무玄武’의 ‘무武’를 따왔다. ‘현무玄武’는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듯이 신화 속의 북방北方의 신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산 자락에 지형을 따라 서로 이어서 지었기 때문에 동서남북에 맞추어 문을 내기 어려워 이러한 오행이 적용되기 힘들었다. 다만 창덕궁의 서문은 ‘금호문金虎門’으로 오행에 적용된다. 오행에서 금金과 호虎가 모두 서쪽과 상관된다.

궁궐 밖에 있는 도성의 4대문四大門도 오행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오행으로 따지면 각각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에 해당한다. 중앙에는 문이 없는 대신 ‘보신각普信閣’에 ‘신信’자를 담았다. 북문인 홍지문은 조선 후기인 숙종 때 세워진 것이며 원래의 북문은 근래에 개방된 숙정문肅靖門이다. 이 숙정문은 원래는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는데 어느 땐가 글자가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9년(중종 4)부터 바뀌어 나오는데 그 연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숙정문은 평상시에는 닫아놓고 통행을 하지 않았는데 큰 가뭄이 들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오행으로 보았을 때 숭례문은 불을 상징하고 숙정문은 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동대문을 현판에 쓰인 대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으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속설에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地氣가 약하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보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이름을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 아니고 현판을 쓸 때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 때까지 줄곧 속칭인 동대문으로 부르거나 원 이름인 ‘흥인문’으로 부른 예가 수백 개나 나타난다. ‘지之’자는 어조사로 넣어준 것이지 이름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문에서는 이러한 용례가 흔하다.


기타 주요 현판의 풀이

경전經典 등 옛 문헌에서 이름을 따 온 경우에는 그 풀이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인 글자 뜻대로 풀이해서는 의미가 잘 안 통할 수도 있고, 그런대로 의미가 통하더라도 원래의 의미와 동떨어질 수 있다.

경복궁의 ‘향오문嚮五門’은 글자만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이는 ?A서경書經?B의 ‘향용오복嚮用五福’에서 온 말이며, ‘향하기를 오복五福으로써 한다’, 즉 ‘오복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경복궁의 ‘흠경각欽敬閣’은 글자대로만 보면 ‘흠모하고 공경함’이란 뜻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를 생각하면 이는 ?A서경書經?B의 ‘흠약호천欽若昊天’과 ‘경수인시敬授人時’에서 따온 말로 풀어야 한다. 두 구절을 합하면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 준다’는 뜻이 된다. 흠경각은 세종 때 물시계와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한 곳이기 때문에 ?A서경?B에서 유관한 구절을 따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창덕궁의 옥류천玉流川 권역에 있는 취한정翠寒亭의 뜻풀이도 주의해야 한다. 얼핏 보면 정자 주위의 숲이 ‘푸르고[翠] 서늘하다[寒]’는 의미일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은 뜻이 있다. 이는 정자 주위의 나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푸른 자태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A논어?B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 해가 겨울이 되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나중에 시듦을 안다’는 뜻으로서 절개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숙종이 취한정을 읊은 시 중에 ‘삼삼족족총환정森森簇簇總環亭, 冒雪凌寒色愈淸(빽빽하게 자라나서 온통 정자를 둘러 있고, 눈 덮인 채 추위 이겨 빛이 더욱 맑도다)’이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해진다.



궁궐은 우리 전통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유형의 문화재인 건축물 자체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건축물에 대한 이해의 방편으로 각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에 대한 이해가 첩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의 기호로만 스쳐 지나가던 현판을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해석해 보면 궁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글·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